1999년 대한민국 가전유통업계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제조 입김이 절대적이던 시장에서 ‘유통’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와 가전유통 오픈프라이스 제도 시행(권장소비자가 폐지) 등이 배경이 됐다.
유통업계 프라이빗 브랜드(PB)가 처음 등장한 것도 유통업계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상징적 결과물이자 유통에 힘이 실리는 요인이 됐다.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1999년 당시만 해도 이마트가 ‘시네마플러스’라는 자체상표로 출시한 TV는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가전유통업계 환경 변화는 하이마트와 전자랜드 등 양판점 형태 유통채널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로 일본 가전업체들의 한국 상륙이 잇따랐고, 제품 유입에 따른 유통업계 선택권 확대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국내 가전제조업계 입지에 영향을 미쳤고, 가전양판점은 서서히 협상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실제로 이즈음 워크아웃 대상으로 결정된 대우의 부실채권을 우려한 국내 가전사가 하이마트에 수백억원의 담보 설정을 요구하는 등 공급조건을 까다롭게 하려 했으나, 결국 가전사는 ‘윈-윈’이라는 명분에 기대어 철회하고 말았다. 가전사 결정에는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에 따른 영향이 고려됐을 것이라는 게 업계 분석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가전유통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오픈프라이스제 도입이다. 제조업체가 정하는 권장소비자가격이 사라지고 유통업체가 판매가격을 내걸면서 유통구조가 제조업체 중심에서 유통업체 위주로 전환됐다. 취지대로 가격 경쟁을 통한 가격인하 효과도 거뒀다. 이제 오픈프라이스제는 가전유통가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게 12년이 흐른 2011년. 대한민국 가전유통업계에 가격표시제가 이슈로 던져졌다. 권장소비자가격, 오픈프라이스제도 아래서도 항상 가격표시는 있어 왔지만 현재 가전제품에 붙어 있는 가격은 ‘협상 참조용’ 가격이다. 이슈가 되는 가격표시제는 실제 판매할 가격을 표시하겠다는 것. 유통가에서는 매우 획기적 발상이다.
활시위를 당긴 건, 삼성 디지털프라자다. 디지털프라자는 유통업체이기 때문에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간 주도권 경쟁으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제조업체 직영 유통점과 다브랜드 양판점간 기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복수 제조업체와 거래하는 양판점으로서는 실제판매가를 표시하는 가격표시제 정착이 협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 대한민국에서 유통구조가 복잡한 휴대폰까지 가격표시제를 종용하는 마당이니, 새해에도 가격표시제는 유통가 큰 이슈가 될 것이 틀림없다. 궁금해진다. ‘몇 백만원 짜리 TV를 써 붙어 있는 가격 다 주고 샀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바보취급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과연 올지.
심규호 전자산업부장 khs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