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통신회담<6>
“양국이 합의를 이뤄 기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1992년 2월 17일.
워싱턴DC 미 무역대표부(USTR) 회의실에서 한미통신회담 양측 수석대표는 여름 장마 끝 햇살처럼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마주잡은 손을 흔들었다. 3년여 만에 타결한 한미 통신회담이었다. 협상타결은 한미 간 새로운 통신시대를 알리는 서막(序幕)이었다.
미 USTR는 18일 한미통신회담 결과를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부시 대통령은 23일 미의회에 타결안을 제출했다.
2월 21일.
미국은 한국에 대한 통신시장개방 우선협상대상국(PFC) 지정을 공식으로 해제했다.
칼라 힐스 미 USTR 대표는 이날 “지난 11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양국 간 통신협상이 지난 17일 타결됨에 따라 1989년 2월 지정했던 PFC에서 한국을 해제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힐스 대표는 “한미 양국 간 협상성공으로 연간 50억달러로 추산되는 한국 통신시장이 개방됐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국익(國益)을 놓고 통신 분야에서 치열하게 다투던 한미 간 통신전쟁이 일단락됐지만 뒤집어 보면 미국 통신업체의 한국시장 진출 확대를 의미했다. 통신협상 타결은 한국 통신시장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통신회담은 ‘성공한 회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측 회담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통신시장 개방시기를 최대한 늦춘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해도 최장 3년간은 미룰 수 있었다. 그 기간 내에 국내 경쟁력을 갖춘다는 전략이었다. 체신부는 통신개방정책을 ‘선(先)경쟁체제 후(後)개방’으로 설정했다. 이런 원칙 아래 1차 통신시장 구조조정안을 만들어 미국 측에 제시하면서 개방시간을 벌었다.
두 번째는 칼자루를 쥔 미국 측에 회담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이나 보복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한국 측은 매번 회담 때마다 조금씩 진전된 안을 미국 측에 제시해 협상을 이어 나갔다. 일부는 한국 측이 가진 패를 다 미국 측에 내주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이는 계산된 전략이었다. 일종의 단계적 양보였다.
협상 타결의 실마리는 그해 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체신부 14층 회의실에서 열린 9차 회담에서 찾았다.
한국 측에서 이인표 체신부 통신협력단장(정통부 통신정책지원국장, SK텔레콤 감사 역임)과 미국 측에서 낸시 애덤스 USTR부대표 등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한국 측 대표단은 체신부 이교용 통신협력과장(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 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우취연합회장)과 박창환 통신진흥과장(작고), 구영보 정보통신업무과장(우정사업본부장, 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장 역임, 현 SK텔레콤 고문), 김원식 정보통신기술과장(정통부 미래정보전략본부장,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장 역임, 현 법무법인 세종 고문) 등과 최병일 체신부 장관 자문관(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이 자문위원으로 참석했다. 이 밖에 박상기 외무부 통상2과장(현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지무남 재무부 회계제도과장(보험감독원 부원장보 역임), 이재훈 상공부 국제협력관실 과장(지식경제부 차관 역임), 민형중 조달청 사무관(현 조달청 기획조정관) 등 12명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 국무부와 상무부, 전기통신정보청 관계자 등이 대표단으로 마주 앉았다.
한미 양측은 한국의 법령과 제도 안에서 분야별 주요 현안에 관해 막판 이견을 조율했다. 한국이 수세였다. 미국은 1989년 한국을 PFC로 지정해 계속 한국 통신시장의 조기개방을 요구했다. 만약 그해 2월 23일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미국은 한국에 무역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해 왔다.
한미 양측은 서비스 분야와 외국인 투자제한 및 폐지시기, 형식승인 절차 간소화 등 정부조달 예외 조항 등 미해결 분야에 대해 서로 입장을 교환했다. 이견을 해소하지 못한 양측은 2월 회담에서 최종 협상을 타결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측 수석대표인 이인표 단장은 그해 1월 7일과 8일 양일간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한미통신업계협의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체신부와 한국통신 등 10여명이 참석해 미국 USTR,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미 통신산업협회(FIA), 통신업계 CEO 등 60여명을 대상으로 한국통신시장 현황과 추진정책 방향을 설명했다. 이인표 단장은 한국통신시장 자유화 추진계획을, 최병일 체신부 장관 자문관은 전기통신법령 개정 내용을 소개했다.
이 무렵, 10차 회담을 앞두고 미국 측이 보낸 문서를 놓고 해프닝이 발생했다.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 대표가 주한미대사를 통해 2월 7일 송언종 체신부 장관(광주시장 역임, 현 21세기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 앞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이 진위논란에 휘말린 것이다. 수신인은 경제부총리, 청와대 경제수석, 상공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 통상 관련 장관이었다.
칼라 힐스는 서신에서 “그동안 한국이 미국 측과 양해록에서 약속한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이런 식이면 미국 측이 한국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상황”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칼라 힐스는 미국 측 관심사항인 통신서비스 참여조건과 전용회선 제한 완화 등에서 한국 측의 특별조치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런 내용의 서신을 받은 체신부가 사실을 파악해 보니 칼라 힐스가 보낸 공식 문서가 아니었다.
최병일 박사의 말.
“USTR 실무자가 보낸 서신이었어요. 칼라 힐스가 서명한 공식 문서는 오지도 않았습니다. 실무자가 ‘협박 전략’을 쓴 것이었습니다. 한국을 만만하게 본 것이죠. 송언종 체신부 장관에게 이는 기록을 남겨야 하며 정면 대응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깐깐한 성격의 송 장관은 2월 11일 주한미대사를 통해 무역대표부 칼라 힐스 대표 앞으로 서신을 보냈다.
송 장관은 서신에서 “양국 간 통신협상이 진행 중인 시점에 한국정부가 이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감스럽다”며 서신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양측의 마지막 협상인 10차 한미통신회담은 그해 2월 11일부터 17일까지 미국 워싱턴 DC USTR 회의실에서 열렸다. ‘타결이냐 결렬이냐’를 판가름하는 최종 담판이었다.
타결이 안 되면 한국은 미국 측의 무역보복을 감수해야 했다. 양측은 당초 14일까지였던 회담일정을 3일 더 연장했다. 타결은 쉽지 않았다.
한국 측에서 이인표 단장과 박창환 체신부 통신진흥과장, 김원식 정보통신기술과장, 노영규 통신협력과 사무관(현 방통위 기획조정실장), 자문위원으로 최병일 체신부 장관 자문관이 참석했다. 김명식 경제기획원 통상조정2과장(한국화재보험협회 상무 역임)과 박상기 외무부 통상2과장, 장지종 상공부 통상협력관실 과장(중기청 차장 역임, 현 중소기업연구원장) 등도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낸시 애덤스 USTR부대표와 국무부, 상무부, 전기통신정보청 관계자 등 8명이 참석했다.
이인표 단장은 회담에 앞서 “한국 측이 양보할 것은 다 양보해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양측 대표단은 진통 끝에 서비스분야와 기기분야, 정부조달 등에서 합의안을 도출했다. 양측은 한국의 부가가치통신(VAN)시장에 참여하려는 미국인의 투자제한을 오는 1994년 1월부터 해제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92양허록’을 작성, 수석대표들이 17일 서명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89년 2월 미국이 한국을 통신시장개발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한 후 3년간 계속돼온 협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김원식 기술과장의 증언.
“저는 정부조달 분야를 담당했습니다. 이 단장이 조달부문 표준과 형식승인 등에 관해 미국 측 실무진과 협상을 타결하라고 지시해 미국 상무부와 USTR 관계자와 협상을 했습니다. 처음엔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한국 측이 논리적으로 대응하자 그들이 당초 주장을 철회해 일찍 협상을 끝냈습니다.”
최병일 박사의 회고.
“한미통신회담은 성공한 통상회담이었습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미 USTR는 미국업계 대변자이거든요. 한국통상회담사(史)에서 한미통신회담은 성공한 사례입니다.”
양측이 합의한 내용은 통신기기 조달과 관련, 한국통신(현 KT)과 조달청이 구매하는 일반 통신기기의 조달을 GATT정부조달협정 절차에 따라 1992부터 개방하기로 했다. 통신망장비는 1993년 1월부터 새로운 경쟁조달 절차에 따라 개방하며 미국 측도 통신장비를 구매할 때 외국인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양측은 기업 간 전용회선 공동사용범위 확대, 신청절차 간소화, 이용제한 완화 및 통신산업 공정경쟁 보장제도 도입 등에 관한 규제도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형식승인 시 시험성적서도 상호인정하기로 했다.
이 같은 회담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미 양측은 모두 10차에 걸쳐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회담을 진행했다.
8차 한미통신회담은 하와이에서 30여 분이나 가야 하는 마우이섬 칼라팔리비치에 있는 웨스턴호텔에서 열렸다. 양측은 합의점을 찾기 위해 창문이 없는 곳을 회담장으로 정했다. 그곳에 들어가면 밤인지 낮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밖에 나오면 해안의 낙조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한국 대표단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교용 과장의 증언.
“우리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는데 미국 측 대표단은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미국 측은 느긋했지요. 우리가 미국 측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 측의 주장이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통신시장 개방이란 신조류에 뛰어들었다. 통신시장개방은 한국통신산업계에 기회인 동시에 위기의 시그널이었다. 그 선택은 우리 몫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