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시민 24명이 한곳에 모였다. 이들은 반으로 나뉘어 특정 역할을 부여받았다. 12명은 교도관, 나머지는 죄수였다. 이들은 교도소와 똑같이 만들어진 세트에 배치됐다.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특별한 지시는 없었다. 실험 초기엔 별다른 문제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맡은 배역에 빠져든 것이다. 교도관은 죄수에게 심한 학대를 가했고, 죄수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상대편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이윽고 죄수 역할을 맡은 일부 참가자가 정신 이상을 보였다. 결국 실험은 5일 만에 종료됐다. 지난 1971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다.
이 실험은 신뢰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들이 극한 대립을 보인 이유는 신뢰가 결여된 탓이다. 갇힌 공간이 주는 압박감도 심리 변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 놓여도 상호 간에 믿음이 유지됐다면, 이처럼 격한 대립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뢰 구축, 사회 번영의 주춧돌=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지난 1995년 출간한 저서 ‘트러스트’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뢰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을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 구성원이 서로 신뢰하면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지만, 서로 불신하는 사회에서는 경제적 번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신뢰에 가장 민감한 곳은 기업이다. 고객이 제품 구매 여부를 판단할 때 신뢰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평소에 해당 기업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구매로 바로 연결된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한순간에 몰락하기도 한다. 엔론 사태가 대표적이다. 엔론은 한때 세계적 에너지기업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2001년 회계장부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고, 분노한 투자자들은 자금을 거둬들였다. 결국 엔론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산에 이르렀다.
2008년 벌어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안전한 줄로만 믿고 있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같은 금융상품이 실제로는 허술한 토대 위에 설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환경 변화로 신뢰 구축은 더욱 중요한 화두가 됐다. 세계는 인터넷으로 연결돼, 지구 반대편 소식을 바로 들을 수 있다. 좋은 소식에서 나쁜 소문까지 바로 전달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을 때 내용이 바로 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업, 사회적 책임에 눈뜨다=기업에 신뢰가 필요한 건 이윤 추구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기업이라면 그 이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주목받는 것이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다. 이윤을 얻는 만큼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그 이윤을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활동이나 환경보호 등이 전통적인 CSR 가운데 하나였다면, 최근에는 점차 범위가 확장되는 추세다. 원인으로는 경제위기가 한 몫을 했다. 1980년대 영국은 정부가 추진한 경제정책 실패로 실업률이 증가했다. 취업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곳곳에서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기업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비가 줄어들면 기업의 영속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삼성경제연구소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과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면, 이제 기업이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할 필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데 드는 비용도 투자로 달리 생각하는 추세다. 공급자 관점이었던 접근 방식 역시 수혜자를 고려한 맞춤형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LG 등 국내 대기업은 몇 년 전부터 ‘지속 가능 보고서’를 내놓으며 CSR를 기업 운영의 중요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객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움직임도 활발하다. 유엔은 지난 2000년 CSR 확산을 위해 글로벌콤팩트라는 국제협약을 발족했다. 가입 대상은 기업이다. 유엔은 오는 2020년까지 회원 기업 수를 2만개로 늘릴 계획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빈곤, 기후변화, 식량위기 등 ‘다중위기’ 시대에는 기업인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의식 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책무”라고 말했다.
◇신뢰, 상생과 동반성장의 필수 요건=기업 간 신뢰 구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는 아직도 나쁜 관행이 자리 잡고 있다. 납품가 후려치기, 인력 빼 가기, 중소기업 영역 침범 등이 대표적이다. 중소기업은 관행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계약 해지 등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 같은 풍토에 대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우리나라 기업 환경은 대기업 중심의 동물원과 같다”며 “강자인 대기업이 독점하는 구조다 보니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화두가 바로 ‘상생’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위기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중소기업 단체 등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문제 제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올해는 정부도 여기에 힘을 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정부 후반기 정책 과제로 ‘공생발전’을 제시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도 이에 화답하는 모양새다. 이 대통령과 30대 그룹 총수들은 지난달 31일 한자리에 모여 공생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 회장은 “경제가 출렁이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체력이 약한 취약계층과 중소기업이 더 힘겨워할 것”이라며 “거래구조를 선진화하고, 협력기업의 체질이 강화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도 일자리 창출, 협력사 지원 등을 약속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이 같은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 생각이다. 무엇보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생태계 구축’이 절실하며, 자본주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기업의 신뢰 구축은 장려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재영 LG경영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언행일치의 철학과 투명한 프로세스 구축이 고객의 지속적인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이라며 “미래기업의 필수 조건인 진정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박창규기자 k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