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세계 평판디스플레이(FPD) 시장은 760억달러를 기록, 전년(592억달러)보다 무려 28%나 급성장했다. 시장 규모가 1년 만에 30% 가까이 늘며 디스플레이 산업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성장률을 달성했다. 이즈음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도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반도체총괄 산하 ‘사업부’ 체제였던 삼성전자 LCD 부문이 ‘LCD총괄’로 승격했다. LCD가 반도체, 휴대폰을 잇는 삼성전자 주력 사업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LG디스플레이 전신인 LG필립스LCD도 2004년 업계 최초로 한미 동시 상장한 데 이어 미래 LCD 사업 거점이 될 파주 디스플레이 단지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1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자
2004년은 브라운관을 이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가능성을 엿보던 LCD가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후 LCD는 TV 시장에 진입하며 급격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대형 LCD 고성장에 힘입어 FPD 시장은 2007년 1000억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이 기간 동안 삼성전자 LCD사업부와 LG디스플레이는 일본, 대만 등 경쟁업체를 앞서는 대규모 양산 투자를 통해 디스플레이 1위 국가 위상을 다졌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차세대 기술 연구개발이었다.
업황 부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성과 LG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세대 LCD 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40인치 LCD(2001년) △구리배선 기술(2002년) △57인치 풀HD LCD(2003년) △70인치 및 100인치 LCD(2006년) 기술 등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개발됐다. 차세대 기술을 선점할수록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우리나라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같은 사례는 최근 유례없는 불황으로 시름하고 있는 LCD 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세대 기술 없이는 생존과 지속 성장이 어렵다는 교훈이자 준엄한 경고기도 하다. 전자신문이 ‘디스플레이, 새 窓을 열어라’는 주제로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 개발 현황과 과제를 짚어본 것도 위기 탈출을 위한 지름길은 오직 기술에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힘들지만 우리나라 업체들은 차세대 기술 역량을 차분히 쌓아가고 있다. ‘미래를 위한 씨앗(Seed for Future)’은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2 시장은 준비하는 자에게 열린다
2010년 4월, 세계 IT 및 전자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애플이 ‘아이패드(iPad)’를 출시하며 스마트패드 시장을 열어젖힌 것이다. 사실 아이패드와 똑같은 형태인 태블릿PC는 이미 시장에서 퇴출 선고를 받은 제품이었다. 하지만 애플은 아이폰(iPhone)에서 구축한 소프트웨어 및 앱스토어 경쟁력을 스마트패드에 끌어들여 대박을 터뜨렸다. 삼성 갤럭시탭 등 경쟁 제품 출현에 힘입어 스마트패드 시장은 올해 8000만대를 넘어설 전망이다. 2013년에는 1억6000만대 수준까지 급성장, 모니터 시장(2억대)에 맞먹는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패드가 노트북, 모니터와 함께 3대 IT 제품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아이패드는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제품이 아니다. 애플은 아이패드용 LCD 패널 개발을 위해 출시 2년 전부터 삼성전자, LG디스플레이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애플은 2000년대 초반부터 스마트패드와 관련한 특허를 취득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장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LCD 업계가 위기를 탈출하고 ‘창조적 대체(Creative Replacement)’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디스플레이 산업에 숙명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를 위한 국내 업체의 연구개발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지난 5월 미국에서 열린 ‘SID 2011’ 전시회에서 삼성전자 LCD사업부가 선보인 다양한 차세대 기술들에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초기 단계 ‘투명 LCD’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투명 LCD는 매장 쇼윈도에 적용돼 다양한 제품 정보를 디스플레이하는 등 소비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냉장고, 창문 등 다양한 영역에 투명 LCD를 적용하기 위한 연구개발이 계속되고 있다. 투명도와 명암비 등을 더욱 개선하고 대형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다.
더욱 중요한 차세대 기술은 디스플레이 소비 전력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그린 디스플레이다. 스마트폰, 스마트패드를 비롯한 휴대형 기기들은 소비 전력을 낮춰 사용 시간을 늘리는 것이 지상 과제다. 삼성전자가 원천 기술을 확보한 전기습윤 디스플레이(EWD),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디스플레이 등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EWD는 전압에 반응하는 흑백 및 컬러 오일(Oil)의 표면장력으로 빛을 차단·투과 및 반사시키는 원리를 이용한다. 같은 크기 LCD에 비해 소비 전력이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해상도 향상과 대형 제품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 개선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내년까지 이 같은 기술적 과제 해결에 적극 나선다. 한 번 충전으로 일주일간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상상해 보자. 차세대 디스플레이가 주도하는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
#3 창의적인 제품·융합 기술로 위기 극복을
최근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국가연구개발사업 총괄워크숍’은 이전과 달리 다소 침체된 분위기에서 개최됐다. 올해로 6회째를 맞는 총괄워크숍은 국내 디스플레이 관련 연구 개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신 개발 동향을 점검하고 개선방안을 논의하는 장이다. 최근 LCD 시황 부진을 반영하듯 패널을 비롯한 부품소재 및 장비 연구원들의 분위기는 작년과 상이했다. 시황 부진이 LCD 산업 뿌리인 연구 개발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장진 경희대 교수(정보디스플레이학과)는 “최근 국내 LCD 업체들이 시황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 개편에 나서는 등 기초 연구개발 분야에까지 악영향을 끼쳐 우려스럽다”며 “미래를 위한 핵심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한 투자 확대와 사기 진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LCD는 반도체, 휴대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IT 수출 품목으로 아직 전후방 산업에 미치는 연관 효과가 막대하다. 일본 업체 간 연합체 구축, 중국의 부상 등 위험 요소가 점차 커지고 있지만 차세대 시장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 물리·화학 등 이종 학문과 융합해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고 창의적인 제품으로 차세대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장 교수는 “최근 LCD 기술은 일본, 대만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투명·플렉시블 디스플레이 등 창의적인 제품으로 차세대 시장을 선점하지 못하면 머지않아 중국과 동일 선상에서 경쟁하는 수준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이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차세대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한다. 이제 양산 투자보다는 차세대 기술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고 관련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20여년의 LCD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위기는 언제나 기회였다.
<특별취재팀> 서동규차장(팀장) dkseo@etnews.co.kr, 서한·양종석·윤건일·문보경·이형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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