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때 제주도 기생 출신 거상 김만덕(金萬德·1739∼1812)은 생선값이 폭락하자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젓갈로 바꿔 팔아 큰 돈을 벌었다. 청나라에서 싸구려 진주가 대량으로 밀반입되자 김만덕은 최상품 진주를 들여와 이를 가공해 파는 기지를 발휘했다. 부가가치 속성을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위기 상황에도 발상을 전환해 어려움을 극복한 성공스토리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가 기생 출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장사수완만으로 부를 일구는데 그쳤다면 아마 지금 여걸로 불리진 않았을 것이다. 김만덕은 당시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장사하는 법을 가르쳤다. 지금으로 보면 창업 인력을 양성한 셈이다. 바다에 흉년이 들면 전 재산을 이웃에 내놓는 ‘통 큰’ 사회기부도 했다. 여걸 김만덕은 이익만을 좇지 않는 바른 장사, 인재양성·베품의 실천, 발상 전환을 통한 위기 극복 등의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세상을 떠난지 200년이 흘렀지만 그로부터 본받아야 할 기업가적 교훈은 지금도 강한 빛을 발한다. 그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제주도에는 김만덕 후예들이 적지 않다. 지난 2009년 기준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이 16개 시·도 중 제주가 1위였기 때문이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와 IT업계에도 남성 못지않게 여성의 섬세함과 봉사정신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현대판 ‘김만덕’이 부쩍 눈에 띈다.
얼마 전 과학기술계로서는 최초로, 환경부 장관에 KIST 책임연구원 출신인 유영숙 장관이 취임한 것이 그랬다. 당시 유 장관의 발탁은 여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조직통솔과 행정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의 결과로 인식됐다.
지난달 국내 최초로 조합회원사가 100% 출자해 대구에 첫 SW벤처타워를 세운 김명화 한국SW개발업협동조합 이사장도 시골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여성 기업인이다. 그는 벤처타워 건립과정에서 벤처집적시설로서 지원받을 수 없는 각종 규제를 직접 발로 뛰며 해결했다. 중소 SW기업에 불리한 각종 제도를 철폐하거나 바꾸는데 앞장섰다.
여성IT기업인들로 구성된 여성IT봉사단도 수년째 사비를 털어 여성 창업 봉사를 펼치고 있다. 우수한 여성인력의 IT분야 창업을 유도하고, 양성한 인력을 스스로 채용하기 위해서다. 어느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김만덕’의 덕목을 실천하는 여성기업인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성 기업인인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얼마 전 제주도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포럼에 참석해 ‘여성인력’이 바로 우리나라의 ‘블루오션’이라고 주장했다. 이젠 여성이 사회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제주도가 이번 달에 김만덕의 경제적 수완과 숭고한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김만덕 상 후보자를 뽑는다. 여러모로 각박한 요즘, 자신의 이윤을 나누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여걸 김만덕이 아주 많아졌으면 한다.
정재훈 전국취재팀 부장 jh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