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분자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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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칼슘용액에서 구슬처럼 겔화되는 알긴산의 특성을 응용한 대표적 분자요리 기법

 이것은 요리인가? 아니다, 이것은 과학이다. 이것은 과학인가? 아니다, 이것은 예술이다. 이것은 예술인가? 아니다, 이것은 한 끼의 맛있는 식사다.

 ‘분자 요리(Molecular cuisine)’는 요리·과학·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주방의 최전선이다. 분자 요리는 음식 문화로서 요리를 과학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새 밀레니엄 이후로는 외식 산업으로 대표되는 레스토랑의 수준을 이끌어나가는 화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 ‘웰빙(well-being)’이나 ‘로하스(LOHAS)’가 생활환경이나 요리 재료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분자 요리는 ‘조리’라는 기술 이야기를 과학과 예술 차원에서 논하게 만들었다.

 ◇‘요리도 과학이다’ 분자 요리의 시작=한 번이라도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마치 마법과 같은 요리의 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험실의 그것처럼 요리는 예민하게 재료·온도·기술·기구에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요리는 과학이다’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1990년대 후반에 나온 분자 요리라는 개념이다.

 1988년 프랑스 화학자 에르베 티스와 옥스퍼드 대학교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쿠르티가 물리와 화학적 측면에서 요리 연구를 진행하던 과정에서 ‘분자 물리 요리학’이 탄생했다. 당시 두 사람은 유럽 전통 음식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과학적 실험 및 분석방법을 도입했다. 이후 좀 더 간결한 용어인 `분자 요리’ ‘분자 미식학’으로 널리 퍼진다.

 분자 요리의 기본은 재료가 가진 맛과 향을 유지하면서 형태를 자유자재로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을 속이고 마치 아름다운 회화 작품처럼 연출이 이뤄진다. 때로는 미각은 시각에서 오는 기대를 배신한다. 사과 모양을 했지만 김치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 나올 수 있다. 또 캐비어 모양을 한 생선 알이지만 망고 맛이 날 수도 있다. 각각 액화질소를 이용하거나 염화칼슘 용액에서 겔화되는 알긴산을 응용한 방법이다.

 분자 요리는 비싸거나 희귀한 요리를 찾아다니는 ‘미식(Gourmet)’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화학도 원자들이 서로 결합해 분자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연구며 모든 요리는 간단히 말하면 분자 단위(당류, 지방, 단백질 등) 합성으로 만들어진 맛의 어우러짐인 셈이다. 우리가 주방에서 흔히 접하는 전자레인지도 마이크로파가 물 분자를 진동시켜 얻은 에너지를 주변 분자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분자 요리는 특정 요리만이 아니라 조리과정에서 빚어지는 과학을 분자 단위로 세밀하게 연구하고 내놓은 조리 과정 전반을 일컫는다. 달걀(단백질과 지방) 하나를 삶을 때도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육식 동물의 관절이나 골격 부위(콜라겐, 젤라틴, 겔)는 어느 정도 온도에서 익는지 모두 오랜 연구결과의 산물이다.

 ◇‘세계를 사로잡은 맛’ 분자 요리의 흐름=분자 요리 대명사로는 해외에서는 스페인의 유명 레스토랑인 ‘엘 불리(El Bulii)’가 대표적이다. 스페인의 로사스라는 작은 어촌에 위치한 이 레스토랑은 치열한 레스토랑 업계에서 최근 4년 동안 전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며 분자 요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엘 불리의 수석 주방장인 페란 아드리아는 지금도 일년의 절반은 레스토랑의 문을 닫고 연구를 진행, 새로운 요리를 내놓는 조리업계의 ‘혁명가’로 유명하다. 스페인 정부 및 지자체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주변 음식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분자 요리를 적극적으로 지원, 육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에서도 일찍이 ‘슈밍화’ 등 청담동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분자 요리가 도입됐으나 유행 이상의 지배적 경향으로 남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가격대에 낯선 음식으로만 조명, 흥밋거리 이상이 되지 못했다.

 지난해 한국 입양아 출신으로 세계적인 분자 요리 전문가로 이름을 떨친 상훈 드장브르가 서울 고메 2010 행사로 내한하면서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상훈 드장브르는 벨기에에서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이는 시간이 흘러 해외 유학을 거친 전문가 집단의 등장 및 ‘피에르 가니에르’ 등 유명 레스토랑의 국내 진출도 한 몫했다. 슈밍화는 사라졌지만 분자 요리의 유행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레스토랑에서는 액화질소를 이용한 아이스크림을 내놓는 등의 디저트 분야에서도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한식의 세계화’ 음식 산업의 발전=여러 조리 과정을 거쳐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우리는 요리라고 말한다.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요리는 부엌, 또는 여성이나 가정의 역할로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혹은 ‘끼니를 때우다’ 식으로 폄하받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음식 자체를 보고 즐기고 느끼는 ‘즐거운 이벤트’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문화가 일부 있다.

 음식은 손맛이고, 정성이지만 다른 말로는 재료에 대한 이해와 시간, 노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자 요리는 음식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서 나아가 분자 단위로 고민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학습한 대로만 행동한다면 발전은 없다. 분자 요리의 대가인 페란 아드리아는 “요리는 창조”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주변국가인 프랑스에 비해 뒤처져 있던 스페인요리는 스페인 카탈로니아 정부의 주도 아래 체계적 정보 공유 및 연구 작업이 진행됐다. 이는 요리계에서 금기시된 ‘레시피 공유’로 이어지며 전국으로 확대, 현재 스페인은 세계 미식가의 새로운 천국이 됐다. 페란 아드리아도 정부와 기관이 힘을 합쳐 만든 요리과학 연구소 ‘알리시아(Alicia)’로 적을 옮겨, 요리기술 연구 및 식생활 개선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까지 참여하고 있다.

 요리 과정 전반에 걸친 미시적 연구와 지속적 혁신이 결국 한 나라를 비롯한 세계의 음식문화 전반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의 와인문화, 일본의 스시문화가 국경을 넘어 세계적 문화가 된 것은 오랜 시간의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한식의 세계화’가 화두가 됐다. 미국 뉴욕 한복판에 ‘무한도전’에서 제작한 한식 광고가 나갔고, 정부에서는 한식 관련 행사 및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스페인 정부에서 지원한 것처럼 문화는 전통의 발굴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도 만들어진다. 단순히 홍보 차원의 일회적 행사가 아닌 김치나 된장, 전통의 발효 및 저장기술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진다면 분자 요리에 버금가는 재조명도 가능하다. 동양의 지혜도 맛있는 과학이, 신비로운 이벤트가 될 수 있다.

 분자 요리의 비밀도 결국 두 개의 손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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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궁정화가로 활약했던 주세페 아르침볼드, 그는 과일이나 야채 꽃을 이용해 독특한 콜라쥬 형태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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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의 대부 페란 아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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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의 대부 페란 아드리아는 요리의 혁신에서 나아가 요리를 통한 사회공헌까지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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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레스토랑인 스페인 엘 불리의 요리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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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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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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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불리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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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틴 등 거품을 내는 첨가물을 이용해 독특한 질감 및 형태를 만드는 것도 분자요리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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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란 아드리가 자신이 착안한 에어폼(거품) 기법을 이용해 만든 요리 이미지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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