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KIST 설립 당시다. 세계 유수 연구소에서 선발한 PI(Principal Investigator)급 연구자들에게 미국 연수를 보내고자 했다. 연구 운영 노하우를 배우게 하기 위해다. 당시 최고연구소인 벨연구소와 상대적으로 위상이 낮은 바텔연구소가 물망에 올랐는데, KIST는 바텔연구소를 선택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기초부터 연구하는 벨연구소보다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그때그때 수탁해 연구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바텔연구소를 벤치마킹하는 것이 당장 경제 부흥을 위한 산업기술 개발이 시급한 우리 현실에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것이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KIST가 개발해 산업 현장에 보급한 기술을 통해 우리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짧은 기간에 경제를 일으키고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지금 많은 개발도상국 관계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KIST를 방문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 어느 선진 연구소보다 KIST를 벤치마킹하는 것이 더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개발도상국에서 출발해 불과 반세기 만에 공적개발원조(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 발전한 전무후무한 성공 사례기 때문이다.
KIST는 동남아, 중남미 국가를 대상으로 과학기술을 통한 ODA 사업을 추진한다. 한-베트남 과학기술협력센터 설립과 인도네시아 에너지 환경연구센터, 중국 황해오염 통제대책 연구 등 각종 사업에 참여했다. 국제 R&D 아카데미를 통해 지금까지 120명이 넘는 석·박사를 배출해 개도국 기술인력 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최근엔 KIST를 방문한 에콰도르 대통령과 코스타리카 외교 장관, 과기부 장관, 에티오피아 과기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연구소 설립과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들 국가에 대한 지원도 준비 중이다. 또, 주한 개도국 과학 담당 외교관 회의를 열어 23개국의 과학기술 담당 외교관들에게 KIST의 지원 의지를 전하고 협력할 의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일련의 활동을 통해 느낀 것은 ODA 사업이 KIST의 주 임무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요청에 따른 응대를 통해 경험을 나눠주는 수동적인 태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곳을 적극 발굴해 나감과 동시에 더욱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콘텐츠 개발에 나서야 한다.
이와 더불어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신화를 현실로 바꾸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반세기 만에 이룩한 발전이 더 이상 신화나 기적으로 묘사되어선 안 된다. 지금의 경제성장을 마치 몇 가지 사건이나 몇몇 지도자, 기업가들의 고군분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한 드라마 내용이 역사인 양 오인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언급되지 않는 과학기술 발전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오늘도 많은 외국 사람들이 성공 사례를 배우려고 우리나라를 찾는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은 실질적인 ‘노하우’지 ‘신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의 균형발전을 돕기 위해 추진하는 ODA 사업은 이제 물질적 공여보다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경험과 노하우의 전수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콘텐츠 개발과 전파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비단 ODA 사업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근현대사,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문길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kcmoon@kis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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