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이통사업권 반납 막후
상대를 보는 눈에 의혹이 가득하면 진실은 어둠 뒤로 숨는다. 그래서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했다. 의혹아궁이에 정치권이 개입하면 사태는 파국(破局)을 향해 질주한다.
CDMA방식의 2단계 공동개발이 막 시작한 1992년 8월 20일.
송언종 체신부 장관(광주시장 역임, 현 21세기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은 이날 오전 9시 체신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불리는 제2이동통신 이동전화 신규사업자로 선경그룹의 유공이 대주주로 참여한 대한텔레콤을 최종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송 장관은 기자들에게 “심사를 전후해 외부 압력은 없었고 사업자 심사결과는 청와대에 사전 보고하지 않았다”며 공정한 기준에 의한 선정임을 강조했다.
체신부는 선경그룹의 대한텔레콤이 포철 신세기이동통신과 코오롱의 제2이동통신 등 3개 법인을 대상으로 서울지역 통신망 건설능력과 연구개발 계획, 외국인 주주와 협력관계, 사업 경영능력 등에 관한 36개 항목을 심사평가한 결과 1만점 만점에 8388점을 얻어 허가대상 법인으로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포철의 신세기이동통신은 7496점, 코오롱의 제2이동통신은 7099점을 얻었다.
체신부가 대한텔레콤을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하자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경그룹의 최 회장은 노 대통령 사돈이었다. 민주당과 국민당은 ‘6공 비리의 대표적 사례’라며 전면 정치 공세를 시작했다. 대통령 사돈이 대주주로 참여한 대한텔레콤이 사업자로 선정된 것은 특수관계를 이용한 로비나 특혜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유공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지 않았다. 이동통신사업으로 얻는 이익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1, 2차 심사 결과도 대한텔레콤이 모든 항목에서 다른 경쟁업체보다 앞섰다며 특혜설은 추측이라고 부인했다.
특혜의혹은 정치권의 뇌관으로 부상했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체신부는 △제2이동통신사업의 절대 필요성 △사업자 선정과정의 공정성 △이 사업이 대통령 임기 말에 추진한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이어 세부평가 항목과 항목별 가중치 및 가중치 부여 원칙, 각 업체의 항목별 점수와 신청서 사본, 심사평가위원 명단까지 공개했다.
사업자 선정을 총괄한 박성득 제2이동통신 심사평가단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의 회고.
“한 점 의혹 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선정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의 인·허가를 공개적으로 종합계획서를 평가 시행해 아무 하자가 없었습니다.”
체신부는 각계 전문가 40명으로 심사평가반을 구성해 6월 26일 사업허가신청서를 접수한 후 선정작업을 시작했다. 6개 컨소시엄을 대상으로 7월 1일부터 27일까지 자격확인심사와 이어 14일부터 28일까지 1차 심사평가를 실시했다. 이 중 평균점수 이상을 얻은 대한텔레콤과 제2이동통신, 신세기이동통신 등 3개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1차 평가결과 대한텔레콤이 가장 높은 8127점을 얻었으며 2위는 코오롱의 제2이동통신(7783점), 3위는 포철의 신세기이동통신(7711점)이 차지했다.
체신부는 8월 4일부터 2차 심사평가에 들어갔다. 2차 심사에서는 통신망 설계능력을 평가하는 특정(서울)지역 통신망건설계획서와 외국 제휴업체의 경영 및 기술협력계획, 상한선 300억~400억원의 이동통신기술개발 일시출연금을 포함한 연구개발 계획 등이 포함된 전기통신발전계획서를 30여개 평가항목으로 나누어 10명의 평가위원을 투입, 1차 심사 때와 같은 방식으로 평가했다.
심사평가는 1, 2차 모두 합숙으로 한국통신(현 KT) 도고수련관(비계량평가)과 체신부 전산관리소(계량평가)에서 실시했다.
체신부는 대학교수와 연구원 등 박사급 전문가 20명으로 평가위원을 선정해 기술과 영업으로 나누어 항목별 채점을 했다.
실무를 지휘했던 박영일 부단장(당시 정책심의관, 현 크레스텔 회장)의 증언.
“공정성을 위해 평가위원들에게 이해관계 여부를 직접 확인했어요. 하루만에 위원선정을 끝내고 곧바로 단체 버스로 도고수련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심사를 한 후 발표 때까지 외부와 격리시켰어요. 저도 같이 합숙을 했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특혜의혹설은 바람 탄 불길처럼 더 번져나갔다. 민주당과 국민당 등 야권은 국정조사권 발동과 국회청문회를 추진하고 있었다. 민심의 바다도 출렁거렸다.
대선을 불과 4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조차 정부의 사업자 선정에 불복을 선언했다. 김 대표는 이날 오후 강릉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제2이동통신사업이 위기국면의 촉매작용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복종해 사업자 선정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22일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김 대표 발언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현직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에 정면충돌의 파국위기였다.
이런 사태는 예고된 일이었다. 김 대표는 노 대통령에게 모두 4번이나 노 대통령 임기 중에 이동통신을 선경에 넘기는 결정을 하면 그 과정이 아무리 공정해도 특혜시비에 휘말릴 것이라고 사업자 선정 연기를 주장했다.
김 대표의 대선캠프에 몸담았던 H씨의 전언.
“YS는 국민 여론을 중시하는 스타일입니다. 여론이 나쁘면 그는 어떤 일이건 바로 궤도를 수정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특혜의혹에 휘말리면 정권재창출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노 대통령과 YS는 주례회동을 했어요. 아무리 공정하게 심사해도 대통령 사돈기업에 이동통신사업권을 넘기면 의혹만 커질 수 있다며 연기를 주장했어요.”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통령 사돈이라고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된다. 공정한 심사와 평가를 하면 문제가 될 게 없다”며 이동통신사업의 임기 내 선정을 강행했다.
김 대표는 최종현 회장과 절친한 사이인 이승윤 의원(경제부총리 역임)을 내세워 최 회장에게 사업권 반납을 설득했다고 한다. 24일 김 대표는 하얏트 호텔에서 최 회장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언론에 “선경이 빠른 시일 안에 사업권을 자진 반납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선경그룹의 사업권 자진반납은 언론들이 ”선경 반납방침 확정“을 대서특필한 지 사흘 만인 27일 오후에서야 이뤄졌다. 청와대와 여당, 정부는 대한텔레콤의 자진 반납이라는 해법을 찾기 위해 막후에서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체신부와 선경은 줄다리기를 했다. 송언종 장관은 박성득 정책실장에게 대한텔레콤의 사업권을 반납받으라고 지시했다.
박 실장의 회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선경은 체신부가 반납하라고 하면 반납하겠다고 했어요. 그것은 체신부의 선정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선경도 자진반납을 하면 자신들이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음 사업권 신청에 참여할 수 없었어요. 주주들과 손해배상 문제도 걸려 있었지요.”
박영일 정책심의관의 회고.
“담당국장이니 제가 손길승 사장을 불렀습니다. 손 사장과는 대학동기입니다. 자진반납을 설득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는 8월 27일 해법의 총대를 맸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이진설 수석(건설부 장관, 서울산업대 총장 역임, 현 센트럴씨티 회장)과 박운서 비서관(상공부 차관, 파워콤 회장 역임)라인이었다. 청와대는 비서실장 명의로 선경에 사업권 자진반납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정치적 해법을 선택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근무하던 서영길 행정관(정통부 우정국장, 티유미디어 사장 역임, 현 세계경영연구원 창조경영연구소장)의 말.
“사업권을 놓고 정치권 공방이 치열했어요. 그 무렵 공문을 기안하라는 지시를 받고 애매하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그후 윗분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릅니다. 그 일은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그가 기안한 공문은 정해창 청와대 비서실장(현 좋은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명의로 최종현 선경그룹과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 김항덕 유공 사장(SK그룹 고문역임) 앞으로 보냈다.
‘이동전화 사업에 관한 권고’라는 제목으로 8월 27일로 보낸 공문(대비경 344-1104)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그간 국가정보산업 발전을 위해 힘써 오신 귀사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2. 최근 정부는 국내의 이동전화 이용 편의를 중진하고 산업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법한 절차와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귀사를 제2이동통신사업의 신규허가 법인대상으로 확정, 통보하였으나 귀사의 대주주인 유공이 대통령과의 특수관계임을 이유로 일부 정치권과 언론 등이 크게 이의를 제기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사회적 불안을 초래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3. 그러나 국론을 조속히 통일하고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에 함께 매진하기 위하여 대한텔레콤의 대주주인 유공이 자기 책임 하에 구성주주를 설득, 사업권을 자진포기하여 현재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는데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공문을 접수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SK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역임, 현 SK그룹 명예회장)은 27일 오후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자진반납을 발표했다. 이전에 체신부에 반납서류를 제출한 후 였다.
체신부는 28일 사업자 선정은 차기 정부로 넘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송 장관은 이날 사업권반납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반려됐다. 사업자 선정발표에서 자진반납까지 7일간 정국을 특혜의혹설로 들끓게 했던 대치정국은 그렇게 해소됐다.
선경그룹은 분루(憤淚)를 삼켰지만 문민정부 들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오늘의 SK텔레콤을 소유했다. 세월의 장난이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신(神)만이 아는 일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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