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들어오고 나서 2년 가까이 농림수산식품부, 지식경제부, 노동부 차관은 한번도 뵌 적이 없는 것 같네요. 한번도 안 오면 조치를 취하든지 위원이 필요없으면 빼든지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정용건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위원장)
"법률에 돼 있어서 저희도 애로가 있습니다."(보건복지부 담당 과장) "오죽하면 당연직으로 해놨는데 한번도 회의에 참석을 안 하나요."(정 위원장)
지난해 6월 30일. 서울 롯데호텔 37층에서 열린 2010년도 제3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오간 대화를 녹취한 내용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지난 20여 년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88년 첫 시행 당시 5300억원이던 기금 규모가 지난해 말 시가 기준으로 무려 324조원이 됐다. 2010년 한 해 동안에만 27조원이 국민 호주머니에서 기금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여전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주먹구구식`이다. 우선 전문성을 무시한 위원회 구성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근로자 대표로 노총 지도부 일색으로 위촉되고 있는데다 갈수록 늘고 있는 지역 가입자를 대표하는 6인에는 음식업중앙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추천 배경을 알기 어려운 단체의 관계자가 포함돼 있다. 매일경제신문이 지난해 1~5차 위원회 출석률을 전수 조사한 결과 위원회 구성과 함께 운영에도 큰 `구멍`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당연직인 차관들의 출석률이 형편없었다. 지식경제부와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은 단 한번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 차관은 단 한 차례 출석하는 데 그쳤다. 이러다 보니 지난해 1~5차 회의 평균 출석률은 66%에 그쳤다. 심지어 의결정족수 11명조차 못 채워 회의 날짜를 긴급히 바꾸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곤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기금운용위원회를 전문가로 구성된 민간 상설위원회로 변경하고, 기금운용공사를 별도 자산운용 전문기관으로 설립하는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16대, 17대 국회에서 개정안이 자동 폐기된 데 이어 정부가 2008년 8월 18대 국회에 새롭게 제출한 개정안 역시 제대로 심의조차 못하고 있는 것. 여권 일각에선 복지부가 아닌 총리실 산하에 `국민연금위원회`를 신설해 2040년이면 기금 규모가 2000조원을 훌쩍 넘어설 국민연금 운용을 총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복지부는 전문성 보완을 위해 이달 말 부랴부랴 `투자정책전문위원회`라는 비상임 기구를 하나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금융, 대체투자, 해외투자, 자원개발 등 4개 분야에서 총 30인 내외 전문가를 3월 중 선발해 안건마다 조언을 받겠다는 계획이지만 본질적 해결책이 아닌 땜질식 처방이란 비판이 일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이날 회의록을 뜯어보니 목표초과수익률 해석을 놓고 장시간 원론적인 대화가 오가다 나머지 의결 사안은 시간 부족을 이유로 줄줄이 `거수기` 통과가 이뤄졌다.
"제가 좀 무식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서 질문하겠다" "원장님이 해외출장 중이어서 대신하겠다.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어서 원칙적 질문을 하겠다"는 발언마저 이어졌다.
심지어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내년에는) 복지부문 투자가 좀 늘어나느냐. 1%는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국회의원들의 집중적 요구가 있다"고 언급했다. 국민이 맡긴 돈을 `복지 재원`으로 사용하자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기금운용위는 1년에 겨우 대여섯 번 열리는 데다 호텔에서 조찬을 겸해 2시간가량 진행되는 게 고작이다.
국민연금법 제103조에 따라 설치된 현행 기금운용위원회는 기본적으로 전문성보다는 대표성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당연직인 차관급 5명과 사용자ㆍ근로자ㆍ지역가입자 대표 12명, 전문가 2명에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총 20명이 멤버다.
당연직을 제외하면 관련 단체가 추천한 사람들이 거의 자동으로 임명되는 구조이다 보니 전문성 부족에 대한 질타는 계속돼 왔다.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고역이다. 수백조 원이나 되는 기금 투자 방향을 정하는 문제는 웬만한 전문적 지식 없이는 의견 개진조차 부담스럽다는 게 일부 위원들 하소연이다.
이로 인해 복지부는 지금도 기금운용위 산하에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 `성과평가보상전문위원회`를 따로 두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투자정책전문위까지 추가되면 책임성 없이 국민연금 투자정보를 사전 공유하는 사람만 더 늘게 된다는 염려마저 제기된다.
무엇보다 기금운용위가 복지부와 연금공단 입맛에 따라 운영되다 보니 중장기 자산 운용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없다는 게 문제다.
최고 전문가들을 두고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중장기 투자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은 1년 단위로 운용 계획을 짜고 대부분 자산을 국내외 운용사에 위탁 운용하는 형편이다.
물론 2009년부터 주식 시장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해 최근 운용수익률은 괜찮은 편이다. 지난해 10.38% 수익률을 기록해 수익금만 30조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에는 -0.18%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경기 상황에 따라 수익률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구조다.
지난해 자산은 어떻게 배분했을까. 여전히 국내 채권이 66.9%로 가장 많지만 국내주식 17%, 해외주식 6.2%, 대체투자 5.8% 등으로 해마다 채권 외에 자산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위험성도 커진다. 게다가 글로벌 경제는 안갯속이다. 자칫 지금의 잘못된 투자 결정이 국민 재산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준행 서울여대 교수(경제학)는 "규모에 걸맞은 기금 운용을 하려면 기금운용위원들 전문성을 높이고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을 선임하는 지배구조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기금운용본부를 이사장에게서 독립시키고 기금운용 조직은 대폭적인 처우 개선을 통해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와 다른 연금 의사결정 조직을 가진 나라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박원웅 국민연금 연구원은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캘퍼스)은 우리와 비슷하게 대표성이 강한 반면 캐나다 연금운용위원회(CPPIB)는 자산운용 전문가들로 구성된다"고 전했다. 13명으로 구성된 캘퍼스 관리이사회는 대표성이 어느 정도 반영됐지만 독립적 권한과 책임을 법규에 명시하고 있다. 캐나다는 전문가 40여 명으로 구성된 투자위원회가 4개 분과위원회를 산하에 두고 있다.
[신헌철 기자 / 이기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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