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이슈] 사이보그

 미래 시대, 사이보그와 결혼한다면 이는 인간 사이의 결혼처럼 인정될까. 영혼의 결혼, 아니 동성 간 결혼이 인정된 사례처럼 로봇과의 결혼도 언젠가는 가능할 일일까.

 좀 더 세밀하게 상상력을 펼쳐서 인체의 절반을 첨단 로봇 부품으로 대체한 인간은 인간인가, 아니면 사이보그로 불러야 하나. 60%, 아니 70% 또는 90%를 넘어 심지어 뇌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인공 부품으로 대체한 ‘존재’는 인간인가 로봇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무엇으로 규정지어야 하는가.

 

 지난해 발간된 김탁환, 정재승의 미래 SF장편소설 ‘눈먼 시계공’에는 다가올 미래,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시대에 맞부딪힐 만한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나온다.

 서기 2050년. 이 시대에는 로봇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해 사람은 언제든지 원하는 종류의 로봇(가사 도우미부터 남편 또는 부인 대용 로봇까지)을 구매할 수 있다. 팔, 다리를 잃거나 장기가 심하게 손상됐을 때는 물론이고 신이 주신 인체보다 더 강한 인공의 금속 수족을 원할 때도 언제든 첨단 부품으로 대체 가능하다. 소재 기술, 의학 기술의 발전은 신체의 모든 부위를 인공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만들고 이를 바꾸는 일까지 지금의 성형수술만큼이나 쉽고 편리해진다.

 소설은 현재 가전제품만큼 일상화된 미래 로봇 문화를 배경으로 점점 인간화되는 로봇과 이와 구분되는 순수 인간(인체)에 대한 범위와 규정, 나아가 사이보그의 권리 등 향후 대중화된 로봇사회에서 나옴직한 고민을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범죄와 버무려 전개하고 있다.

 소설 속 2050년 로봇은 휴머노이드,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구분 없이 인간과 어울려 살아간다.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휴머노이드는 겉모습만으로는 인간인지 로봇인지 구분할 수 없다. 개·원숭이·말 등 동물의 형상을 한 생체 로봇도 각각의 개성과 기능을 발휘하며 그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서울시 보안청 검사인 주인공은 살해당한 인간의 뇌에 남은 마지막 영상 기억을 추출해 범죄 해결의 단서로 활용한다. 소설 속 범인은 이 뇌를 격투로봇에 이식해 프로그래밍으로는 어려운 인간의 원초적 분노를 로봇에 심고, 이를 상업적 격투로봇대회에서 이용한다. 마지막에 범인이 잡혔을 때는 로봇 증인과 증거, 행위 등을 놓고 치열한 법정 논쟁이 전개된다. 기계 몸이 70% 이상인 사이보그의 증언을 인간의 증언과 똑같이 인정할 수 있는지부터 뇌를 이식한 로봇의 기억을 원래 뇌 소유자였던 인간의 기억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등등.

 

 그렇다면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현재 닥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괜한 고민일 수 있지만 이 소설처럼 이 문제는 여러 영화 속에서 매우 인기있는 소재로 다뤄져왔다.

 대표적으로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이 그렇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을 보여준 이 영화는 미래 시대에 과연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고 규정될 것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다시 ‘눈먼 시계공’으로 돌아와보자. 작가는 소설에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경계를 ‘신체의 30% 이상이 자연산인지 아닌지’라는 조금 애매한 기준으로 갈랐다. 소설 속 시대에서 인체의 여러 부위, 즉 장기나 팔, 다리, 심지어 안구까지 인공물로 바뀌었어도 그것이 타고난 인체를 100으로 봤을 때 70%만 초과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맡기려는 것인지 왜 70%인지 그 기준을 설명하는 내용은 없다.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영화를 봤다면 한 번쯤은 미래 과학기술이 인간의 상상력만큼 발달했을 때 ‘정말로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 될까’를 생각해봤으리라. 그 생각은 결국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그 어떤 기준을 추적하기 보다는 ‘내게도 저런 로봇이 있다면 좋겠다’로 끝맺는다.

 

 한때 노예제가 성행했을 때 노예는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지금 애완동물은 때로는 인간으로부터 인간보다 더 사랑받는다. 미래에 로봇은? 혹자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인 뇌까지 인공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기에 ‘타고난 뇌’의 존재 여부가 사람과 로봇을 가르는 기준이라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로봇이 첨단화돼도 섬세한 인간의 감성까지 갖출 수는 없다는 점에서 ‘감성 유무’를 기준을 삼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소설처럼 사람의 뇌를 이식한 로봇은 또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뇌가 바뀐 인간의 정체성은 뇌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뇌를 제외한 외모, 즉 신체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벌어지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 논거를 찾기보다는 일단 그러한 로봇이 등장하는 시대를 상상하는 것이 편할까.

 현재까지의 로봇은 제 아무리 최신 기술이 적용됐다 해도 감성을 공유할 수준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언젠가는 내 주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가까운 사람의 뇌를 이식한 로봇이 나올 수도 있다. 이미 팔, 다리는 물론이고 인체의 장기까지 인공으로 대체해가고 있는 시대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그대로 이식해 아인슈타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휴머노이드는 아인슈타인일까 로봇일까.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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