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S수주전 스타트
통신장비제조업체에 한 장이 배정된 개인휴대통신(PCS) 사업권을 따내기 위한 빅4 간 경쟁은 치열했다. 정보통신부가 1996년 3월 6일 신규통신사업자 선정방침을 수정하자 재계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통부 수정발표는 시합을 앞두고 심판이 느닷없이 경기규칙을 바꾼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예상 못한 복병(伏兵)이었다.
수주전이 ‘승자독식’의 지형으로 변하면서 재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절기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약동의 춘삼월(春三月)이었지만 재계는 남녘의 화신(花信)에 귀 기울일 여유조차 없었다.
정부의 새로운 사업자 선정의 기본방침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대기업의 경제력집중 완화였다. 둘째는 제조업과 관련기기 산업발전이고 셋째는 중소기업 육성이었다. 이는 문민정부의 경제정책과 일맥상통했다.
정통부는 신규통신사업자 신청은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접수하며 세부심사 기준은 신청서 접수 직후 확정해 공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석채 장관은 정통부가 이미 확정한 사업자허가 신청요령을 왜 수정했는가. 청와대 지시에 충실하기 위해 선정방침을 변경한 것인가.
이에 대한 이 장관의 증언.
“한국통신과 제조업체, 비제조업체에 사업권을 각 하나씩 주기로 한 것에 대해 나중에 LG그룹에 사업권을 주기 위해 수정했다는 의혹을 일부에서 제기했는데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사업자를 유형별로 나눈 것은 국가경제 전체를 보고 결정한 것입니다. 제조업과 중소기업 육성, 그리고 대기업의 문어발식사업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유형을 구분하지 않으면 선정된 사업자가 자기와 경쟁관계인 업체에 장비 발주를 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 장관은 이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각계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내부에서 간부들의 의견도 물었다.
정통부 고위관료 B씨의 말.
“이 장관은 어떤 정책결정을 내리기 전에 각계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납득이 안 되면 귀찮을 정도로 상대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부내에서도 그랬습니다. 이 장관은 특히 제조업 육성에 역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장관은 최종 결정은 자신이 했다고 한다.
이 장관을 잘 아는 고위 경제관료 출신 C씨의 증언.
“이 장관은 최종 정책 결정은 자신이 합니다. 그 일이 어렵더라도 일을 미루거나 책임을 피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게 멍에가 될 때도 있어요. 이석채라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정통부는 사업신청 기업의 도덕성 평가와 관련해 사업자 신청 마감까지 공정거래법 등 관련법에 따라 지속적으로 사실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 바람에 나중에 기업 간에 도덕성을 놓고 우위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규태 통신기획과장(서울체신청장 역임, 현 한국IT비즈니스진흥협회 부회장)의 말.
“정통부도 인터넷 등을 통해 사전에 기업의 도덕성을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심사과정에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실제 기업의 도덕성을 심사점수에 반영했다면 재벌기업들은 어떤 사업에도 참여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통부는 참여 희망업체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려던 설명회를 열지 않았다.
그 대신 접수한 업체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3월 8일 오후 4시 PC통신인 천리안 및 하이텔을 통해 게시했다. 이후에도 질의에 대한 답변을 1주일 단위로 PC통신에 게시했다.
이 통신기획과장의 계속된 증언.
“두 가지 이유로 설명회를 열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시일이 촉박했습니다. 다음은 이미 발표한 기준에 일부만 변경했기에 별도로 설명회를 열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이런 기준이라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다수 참여하는 컨소시엄일수록 사업권 획득에 단연 유리했다. 방패가 있으면 창이 있는 법이다. 정부의 수정방침에 대한 빅4의 대응은 신속했다. 당시 PCS는 신규통신사업의 심장이었다.
그해 3월 7일.
LG그룹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LG그룹은 이날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사업설명회를 열고 장비업체인 LG정보통신과는 별도로 운영회사인 LG텔레콤을 설립하기로 하고 발기총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LG그룹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참여했거나 참여를 희망하는 100여개 기업 대표 250여명이 참가했다.
사업 추진팀장인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LG텔레콤 사장·부회장,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장 역임, 현 마루홀딩스 회장)은 PCS 사업의 상승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본금 약 5000억원 규모의 운영회사인 LG텔레콤을 3월 중에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정 사장은 컨소시엄에 참가할 구성주주들의 확고한 투자의지를 과시하고 경쟁기업과의 차별화를 위해 20일까지 구성주주들의 지분에 따라 우선 총 100억원을 지정된 은행에 예치토록 하되 참여주주들의 지분은 주도주주인 LG정보통신이 15일까지 확정해 개별 통보하겠다고 설명했다.
LG그룹은 이날 국내 최초의 교환기 수출 135만회선 달성, 국내 최초의 CDMA 사용시험 합격 등 그룹의 통신사업 실적을 소개하면서 PCS사업 수행을 위한 기술, 재정, 경영능력의 우수성을 들어 ‘LG그룹의 PCS 사업참여는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을 위한 의무이며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LG그룹은 특히 미국 PCS 운영사업자인 넥스트웨이브에 2억달러 이상의 CDMA 장비와 단말기 판매권을 갖고 있으며 샌디에이고에 공장도 짓고 있다고 소개하고 앞으로 한국의 유망 통신장비 수출품목이 될 CDMA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중소기업과 공동개발, 해외시장 동반진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루 뒤인 3월 8일.
PCS사업을 준비해 온 대우그룹이 삼성과 LG, 현대 등에 통신업체 간 대연합을 공식 제의했다. 최영상 대우그룹 정보통신단장(대우 불가리아본사 사장 역임)은 사업설명회를 열고 “4대 장비업체가 시장을 국내로 제한하지 말고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자”고 제의했다. 최 단장은 “만약 4대 그룹이 참여하는 컨소시엄 구성이 여의치 않을 경우 1~2개 업체가 연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일주일 후인 3월 15일.
한국 기업사(史)에 이정표가 될 만한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업계 랭킹 1, 2위를 차지하는 삼성과 현대가 장비제조업군에서 가장 먼저 PCS사업 제휴라는 사상 초유의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앙숙에 가까운 두 재벌의 제휴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기업세계의 냉엄한 현실을 반영했다.
삼성과 현대는 이날 정통부 기자실에서 사업추진 설명회를 갖고 “6월 선정될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에서 제휴키로 합의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국내 최강의 컨소시엄 구성이었다.
남궁석 삼성데이타시스템 사장(정통부 장관, 16대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역임, 작고)과 김주용 현대전자 사장(고려산업개발 사장 역임, 현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은 PCS 사업자 선정과 관련, 양사가 연합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 업체 사장은 “1998년 통신시장 개방을 앞두고 굴지의 선진국 통신사업자들이 국내시장 진출을 추진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들 선진 거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양사가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면서 양사 제휴 배경을 설명했다.
양사는 PCS 사업권을 획득할 경우, 곧 양 그룹에 속하지 않는 합작법인을 설립,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전문경영인에 의한 독자적 경영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두 그룹은 초기 자본금 2000억원 규모의 연합컨소시엄에 100여개의 중견·중소기업을 참여시키고 이들에게 양사가 보유하고 있는 통신 관련 기술 및 노하우를 적극 이전하는 방안을 강구키로 했다고 밝혔다. 또 연합컨소시엄 지분은 삼성·현대가 각각 20%, 중견기업 30%, 중소기업 30%로 나누는 문제를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두 그룹은 이어 각기 운영해오던 PCS사업 추진팀을 통합, 운영하기로 하고 이날 합작계약서 작성작업에 들어갔으며 앞으로 통신사업 분야에서 공동위원회를 구성, 기술교류를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숙명의 라이벌관계인 두 재벌 간 제휴는 누가 어떻게 추진했을까.
이를 성사시킨 사람은 남궁석 사장과 홍성원 박사(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KAIST 서울분원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 라인이었다.
홍 박사는 당시 현대전자 부사장으로 영입돼 글로벌스타 사업을 추진했고 현대통신서비스사업본부장으로 PCS사업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남궁 사장은 삼성그룹 통신사업기획단장이었다. 남궁 사장은 특이하게 삼성과 현대그룹을 오가며 근무한 드문 경력자였다. 남궁 사장은 이전에 현대전자 부사장으로 일했다. 그는 두 그룹의 오너들과 대화가 통하는 사이였다.
홍 박사의 기억.
“남궁 사장과는 자주 만나서 사업권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삼성과 현대가 손잡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오래전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획기적인 안이었습니다. 둘 다 ‘그것 좋은 아이디어다. 그러면 한번 추진해 보자’고 해서 추진을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런 계획을 그룹회장에게 각각 보고해 승낙을 얻었다. 홍 박사는 정몽헌 현대전자회장(현대그룹 회장 역임, 작고)에게 보고해 결심을 받아냈다. 남궁 사장은 3월 13일 이건희 회장의 승인을 받았다. 이 회장은 당시 일본 출장 중이었다.
홍 박사의 계속된 증언.
“당시 두 회사의 제휴 자체가 큰 이슈였습니다. 일부에서는 두 회사의 제휴에 대해 ‘쇼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컨소시엄 구성이고 심사에서 꽤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사업자 선정 수정안에 대해 재계는 합종연횡이란 짝짓기 묘수로 대응했고 이런 현상은 들불처럼 각계로 번져 나갔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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