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시침(時針)은 멈추지 않아 어느덧 세밑을 맞았다. 1995년 12월 21일.
영하의 날씨 속에 검정색 승용차들이 청와대 본관 앞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이수성 국무총리와 신임 국무위원들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신임 장관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2층 회의실.
김영삼 대통령은 나웅배 경제부총리(현 전경련 기업윤리위원장)를 비롯한 새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이어 전 국무위원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현실에서 확대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변화와 개혁,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시대적 소명에 충실하며 역사적 평가를 두려워하는 내각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회의가 끝나자 청와대 본관 앞 계단에서 새 각료들과 환한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은 청와대 일정을 끝내고 오전 10시께 정보통신부 청사에 도착했다.
이계철 정통부 차관(한국통신 사장 역임) 등 간부들의 영접을 받은 이 장관은 곧장 22층 장관실로 올라가 박성득 기획관리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데이콤 부회장 역임)으로부터 간단한 업무브리핑을 받았다.
이 장관은 11시 강당에서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정통부 새 수장인 이석채 장관.
그는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논리를 갖춘 최고의 엘리트 정통경제관료 출신이다. 여기에 주인형 기질을 갖춘 소신파였다. 경북 성주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리더십과 보스 기질이 있어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969년 행정고시 7회로 공직에 입문,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고시 동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동기 4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문민정부에서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과 이 장관이, 국민의 정부에서 강봉균 현 민주당 의원(정통부 장관 역임), 이기호 전 노동부 장관 등이 경제수석으로 일했다.
학구열이 강한 이 장관은 공무원 시절 미 보스턴대에 유학,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업무처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 시절부터 그가 기안한 서류는 중간에 한 자의 첨삭 없이 그대로 장관에게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 정책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과장 시절 뛰어난 기획력과 브리핑 능력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대통령 비서실 경제비서관을 지내며 ‘장관급 과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인 1989년 대통령비서실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 부단장을 1년여 맡았다. 청와대에서 경제비서관으로 근무하며 5, 6공의 경제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명쾌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거침없이 추진한 소신파였다.
그와 각별한 사이인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 장관의 특장(特長)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가 갖지 못한 몇 가지 특출한 장점이 있다. 우선 그는 아는 것이 많다.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달변에다 치밀한 논리까지 구비했다. 누구에게도 논리에 밀리지 않는다. 그는 청렴하다. 부정한 돈을 절대 먹지 않는다. 정통부 장관 시절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해 기소됐으나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가 돈을 받았다고 믿지 않았다. 의리(義理)를 중시해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변하지 않는다. 지인들의 상가(喪家)에 가면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석채를 항상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고 한다.
1992년 4월 그는 국가 예산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으로 임명됐다.
이 시절, 그는 예산관련 법령을 고쳐 예산개혁을 주도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많이 했다고 한다. 청와대를 비롯해 정치권의 예산편성과 관련한 외압이나 청탁을 일체 배제했다. 상대가 누구든 부당한 예산편성 요구에는 이를 물리쳤다. 그러다 보니 사방에 미운털이 박혔다. 그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예산편성을 놓고 정치권과 수없이 부딪혔다.
그의 회고.
“예산과 관련해 청와대나 각 부처에서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산실장 하면 대한민국에서 부탁이라는 부탁은 다 받습니다. 그런 부탁을 다 들어 주면 국가재정은 파탄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악명을 떨치게 됐어요.”
하지만 해박한 지식과 논리적인 언변을 구비한 그를 아무도 압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정부 예산편성 방식을 개선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김종인 청와대경제수석(보사부 장관 역임)의 부탁으로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 부단장을 맡았을 때였다.
그의 증언.
“그 당시 보니까 예산을 필요나,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선할 점이 너무 많았어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산을 안배하는 방식을 과감하게 개선키로 했습니다. 예산은 선택의 예술입니다.”
그는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위한 목적세로 교통세를 신설했다. 그로 인해 당시 지자체장과 국회의원 등이 들고 일어나 그와 엄청난 논쟁을 벌였다. 그 시절 그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이 “당신은 나중에 조광조처럼 될 것”이라는 독설이었다.
그는 5년간 한시법으로 운영하던 사법시설특별회계법도 폐지했다. 이 법은 법원과 검찰 등 사법기관의 청사 신축과 수리를 위해 한시적으로 만든 법이었다. 그가 이 법안 폐지를 주장하자 이를 놓고 정부 내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모 법관은 성명서를 발표했고 검찰은 시위를 할 정도였다. 대법원과 대검찰청 등에서 최각규 부총리(강원도지사 역임, 현 현진그룹 경영고문)에게 압력을 넣어 최 부총리조차 “이것은 국무총리와 협의해 처리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최 부총리에게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결국 이 법은 1994년 폐지됐다. 그는 꼭 필요한 사업이 아니면 신규사업에 예산을 단돈 1원도 편성하지 않았다. 특히 정치적 타협을 거부했다.
그가 예산편성에 관한 소신을 굽히지 않자 그를 아끼는 한 선배가 그에게 충고를 했다.
“당신은 공무원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공무원은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하면 된다. 그러나 당신은 그게 아니다. 마치 나라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공무원을 그만두고 정치를 해라.”
이 장관도 이런 점을 인정했다. 그는 농담으로 “그동안 관료생활을 해온 것도 참 신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선심성 사업을 벌이게 마련이다. 당시도 그랬다. 고속전철과 영종도로 건설비가 500억원인데 이를 대도시 지하철건설비로 돌리면 표가 500만표 늘어난다고 했다. 여당인 민자당조차 예산전용과 선심성 성격의 팽창예산을 주장했다. 그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국가 위기상황이 아닌 이상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랬더니 고등학교 선배인 김덕룡 정무1장관(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대통령 사회통합특보)이 제안을 했다.
“이 실장이 신한국당 의원총회에 와서 예산편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세요. 시간은 25분이오.”
그는 정치인들도 예산이라는 국가 재정을 알아야 책임정치를 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흔쾌히 민자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예산편성의 방향에 대해 정확히 25분간 설명했다. 그리고 재정정책 방향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예산실장이 집권 여당 의원총회에 가서 25분간 강연하고 의원들의 예산증액 요구를 일거에 잠재운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그 이듬해 그는 야당인 민주당 의원총회에도 가서 정부의 재정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서 김대중(15대 대통령, 작고), 이기택(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야당 지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야당 의원들과 정부의 예산편성 방침을 놓고 날선 공방을 벌였다. 그는 여기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당의 재정방향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리고 상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론으로 설득시켰다. 이 일도 한국 야당사(史)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장관의 증언.
“그 당시는 제가 객기(客氣)를 부렸어요. 하지만 그렇게 한 덕분에 예산편성 원칙을 지킬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건전 재정을 달성했어요. 당시 야당의 반발이 컸습니다. 예산실장 할 때 야당이 손봐야 할 대상 1순위로 찍혔어요.”
그래서인가. 훗날 그는 정권이 바뀌자 정통부 장관 시절 추진한 PCS사업허가와 관련한 일로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는 예산실장을 거쳐 농림부 차관으로 발탁됐다. 의외의 인사였다.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한국은행 총재 역임)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무위원이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나?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얼마나 권력을 남용하는지 아나? 그래도 지금은 당신 같은 사람이 행정부에 꼭 필요하다.”
이 부총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고 한다.
농수산부 차관 시절에는 농어촌 발전대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정치력도 구비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쌀 협상을 맡았고 재정경제원 차관으로 재임하던 1995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쌀 협상에 정부대표로 참석해 막후협상을 마무리했다. 딱딱한 분위기를 폭탄주로 녹였다는 일화가 있다.
‘주인형’인 이 장관의 등장은 정통부에 변화라는 새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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