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27>
YS 대노하다, “정책을 또 뽑기로 결정하나”
사업자 추천방식
“한 수석, 이게 무신 일이고. 아니 통신사업자를 또 뽑기로 결정한다는 게 말이 되는기가.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한 신규 통신사업자 선정 기준과 관련해 한 수석은 그 내용을 보고 받았다면서?”
1995년 12월 18일.
정보통신부가 신규 통신사업자 허가신청 요령을 발표하고 나흘이 지난 월요일 아침 7시경.
한이헌 청와대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이 출근하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책상 위의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였다.
“한 수석입니다.”
수화기를 들자 김 대통령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소 흥분된 어조였다.
“도대체 뭐가 우째된 일이고. 국무총리한테 전화해도 잘 모르고.”
김 대통령은 일요일자 조간 J신문의 사설 내용을 언급하며 신규통신사업자 선정기준에 대해 역정을 냈다. 대통령이 집무실이 아닌 관저에서 아침 일찍 이런 전화를 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한 수석 출근 전 김 대통령은 여기 저기 전화해 사실을 확인하려 한 듯 했다.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였다.
“각하, 통신사업자는 정통부가 마련한 선정 기준에 따라 그곳에서 공정하게 선정하면 될 일입니다. 사업자 선정에 각하나 경제수석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며칠 전에 요약본을 각하께 올렸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국가 정책을 또 뽑기로 결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가?”
“각하,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청와대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정통부가 선정기준에 따라 가장 유능한 기업을 사업자로 선정할 것입니다. 그 일은 정통부에 맡기면 된다고 봅니다. 동점(同點)이 나오면 당연히 추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점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김 대통령이 한마디를 덧붙이며 전화를 “찰칵” 끊었다.
“참 경제수석도 문제야.”
한이헌. 행시 7회로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을 거쳐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시절 김 대통령의 ‘경제가정 교사’ 역할을 하며 김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문민정부 출범 후 공정거래위원장과 경제기획원 차관 등을 거치며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하면서 한 번도 김 대통령한테 질책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한 수석이 이날 김 대통령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제수석도 문제’라는 꾸지람을 들었다고 기억했다.
한 수석은 곧바로 경상현 정통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사업자 선정에서 동점이 나올 확률이 있습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한 수석은 본의 아니게 대통령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그는 기분이 영 찜찜했다고 한다.
“혹시 대통령께서 물으시면 동점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십시다. 사태를 좀 지켜보기로 하십시다.”
그 무렵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업무에 관해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한 수석의 증언.
“처음 청와대에 들어오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넘칩니다. 자칫하면 시행착오를 겪기 쉽습니다. 그래서 정부 부처의 역할과 청와대 수석 역할에 대해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정책은 부처 장관이 책임지고 청와대는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거나 대통령의 관심사를 챙기는 역할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신규 통신사업자 선정과 관련해서도 정통부보다 내용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싶어 따져 묻지도 않았다고 했다.
청와대 업무처리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경제수석이 대통령에게 대면(對面)보고를 하지 않고 요약본을 만들어 대통령부속실로 넘겼다고 한다. 대통령이 이를 본 후 관심사항이나 지시할 내용이 있으면 추가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별다른 지시가 없으면 그대로 각 부처에서 시행했다고 한다. 신규 통신사업자 선정요령도 김 대통령이 읽어 본 후 서명해 내려보냈을 것이라고 한 수석은 회고했다.
경 장관이나 한 수석은 추첨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일요일자 조간 J신문의 사설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두 사람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자.
경 장관은 분당 자택에서 일요일 아침에 배달된 조간 J신문의 사설을 읽었다. 그는 사설 논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김 대통령이 화를 내고 나중에 문제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선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사전에 충분히 내용을 협의해 발표했고 그런 기준에 대해 청와대도 찬성했던 것이다.
경 장관은 신문 사설을 꼼꼼히 읽어본 후 ‘유력지 논설위원이 거두절미하고 일부만 가지고 이런식으로 사설을 쓰도 되나’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경 장관의 말.
“추첨방식과 관련해서는 정통부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했습니다. 경우의 수를 놓고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가를 고민해 결정했지요. 통신사업자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내부에서도 수차례 회의를 했습니다. 신문사설은 이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런 추첨방식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어요.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지요.”
한 수석도 일요일 집으로 배달된 문제의 조간 J신문 사설을 읽었다. 그는 “이건 정책도 아니고 통신사업자 선정기준인데 뭘 이렇게 문제를 삼나?”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J신문의 사설내용은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신규통신사업자 추첨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설 제목부터 감성을 자극했다. ‘통신사업자 또 뽑기’라는 제목이었다. 국가적인 사업을 이른바 ‘또 뽑기’로 결정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논리였다.
사설은 사업자 선정시기를 ‘1996년 상반기에 추첨으로 선정키로 한 것은 당국의 무사안일성을 잘 말해 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추첨으로 통신사업자를 선정키로 한 것은 정부의 고유권한을 포기한 것으로 비판받을 수 밖에 없으며 이런 주요 정책을 추첨에 맡겨 말썽이나 피하려는 것은 책임 있는 행정 자세가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더욱이 ‘추첨으로 기술력이나 자금력이 떨어지는 업체가 뽑혔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아울러 사업자 선정도 내년 초로 앞당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한 수석의 증언.
“당시 김 대통령은 정치에는 9단이란 말처럼 직접 관여했습니다. 하지만 경제 분야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부처 장관이 소신을 갖고 이렇게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하면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연히 야단을 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김 대통령이 통신사업자 선정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한 수석은 김 대통령이 유독 통신사업자 선정, 그 중에서 PCS사업자 선정방식과 관련해 이렇게 역정을 내는 데는 배후가 있다고 판단했다. 누군가 김 대통령에게 선정방식에 대해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보고했다고 생각했다.
일요일 조간 J신문의 사설을 보고 그날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에게 추첨방식으로 사업자를 선정하면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경제 문제에 대해 경제수석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보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비선라인 밖에 없었다. 한 수석은 보고채널이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라고 추정했다. 그가 아니면 일요일 청와대에 들어가 김 대통령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 현철씨에게 그런 내용을 대통령에게 말하도록 부추긴 측은 누구일까. 언론에 그런 식으로 사설을 싣도록 배경을 제공한 곳은 어디인가.
한 수석의 설명.
“추첨방식을 적용할 경우 사업자 선정에서 불리한 기업이 언론을 움직여 문제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현철씨와 가깝게 지낸 L그룹이 언론을 부추겨 그런 사설을 쓰도록 했고 그 사설을 지렛대로 삼아 현철씨가 김 대통령에게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보고를 했다고 봐요.”
정통부는 처음에 미국처럼 주파수 경매제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안은 자금이 풍부한 재벌들에 절대 유리했다. 이 경우 ‘돈 놓고 돈 먹기’라는 특혜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삼성이나 LG, 현대, 대우 등 이른바 ‘빅4’ 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들조차 황금알을 낳는다는 통신사업에 출연금을 아낄 리 없었다.
정통부는 고심 끝에 통신사업자와 각계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결정한 안이 1차 서류심사 2차 출연금비교 3차 추첨방식으로 사업자를 선정키로 결정한 것이다.
경 장관의 설명.
“통신사업에 진출하려는 대기업들은 기술력이나 자금력은 충분했어요. 이런 기업들을 심사할 경우 그 점수 차이는 0.1혹은 0.2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출연금액수대로 선정하면 사업권을 재벌한테 주는 꼴입니다. 그래서 최고금액을 정해 놓고 그 범위에 들면 추첨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확정한 통신사업자 선정기준에 대해 김 대통령이 대노(大怒)했다. 이에 앞서 경 장관은 10월초 한승수 대통령비서실장이 “PCS기술표준방식과 관련해 CDMA 방식을 단일표준으로 하지 말고 복수표준으로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며 ‘복수 허용’을 요구했으나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규통신사업자 추첨방식이 논란이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기침’을 한번 하면 해당부처는 감기에 걸리는 법이다. 이런 것이 며칠 후 정통부 장관 경질의 한 동인이 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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