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기념해 만든 성지다. 나병이라 부르는 한센병 환자들의 요양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매달 이곳에서는 조촐한 행사가 열린다. 올해도 지금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명확한 행사 이름도 없다. 참가자도 다소 의외의 인물들이다. 다름 아닌 삼성전자에서 퇴역한 임원, 시쳇말로 `어제의 용사들`이다. 이미 예순을 넘겨 머리가 반백인 이들이 찾는 이유는 단 하나 `봉사 활동`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매월 하루는 이곳에 모인다. 많을 때는 30명에서 적을 때는 10여명이지만 봉사 활동을 거른 달은 한 번도 없다. 이미 현장에서 떠난 지 길게는 20년이 넘었지만 당시 회사에 몸담았던 열정 그대로 성 라자로 마을을 찾는다.
지난달 18일에 이어 이달 15일에도 여지없이 라자로 마을 `재복 동산`에 옹기종기 퇴역 임원들이 모였다. 4시간 넘게 분주히 잡초를 뽑고 동산 주변을 청소했다. 7월 18일 봉사 활동과 관련해 전자사랑 게시판에는 새벽부터 잔뜩 흐려 봉사활동을 망설였지만 비온 끝이라 물기가 남아 오히려 훨씬 보람 있었다는 양재규 봉사단장의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아! 잡초(雜草), 온갖 잡초. 정말 많이 뽑았습니다. 뽑고 또 뽑아도, 끝도 없는 잡초. 온 몸에 땀이 범벅이 되도록 뜯고 베고 하였지만, 역(力)부족한 하루였답니다. 새로 나오신 김순 회원께서 말씀하시기를 `왜 진작 이런 좋은 활동에 참여 하지 못하였던가` 하고 크게 후회(?)하시며 매달 참가를 약속하셨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이날 반팔 작업복을 입고 온 일부 임원은 모기에 물리는 사고 아닌 사고도 있었고 일부 회원은 피서를 앞두고 참석해 감탄의 박수를 받았다며 유쾌하게 글을 맺었다.
매월 성 나자로 마을 봉사 활동을 주도하는 단체는 삼성전자 `전자사랑모임`이다. 이 모임은 퇴임한 전자 출신 임원들의 친목 단체다. 삼성전자 초기 반도체 신화의 주역인 김광호 부회장이 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처음에는 친목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사회 환원과 기부 활동과 같은 봉사 활동에 더욱 관심이 높다.
김광호 회장은 “대기업 임원 하면 대부분 회사밖에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회사일 이외에 무언가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를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둡습니다. 막상 회사를 떠나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열정과 지식이 너무 안타까워섭니다. 국가 · 사회 · 회사에서 혜택을 받은 만큼 이제는 돌려주자는 소박한 마음입니다.”
전자사랑모임은 사회봉사 외에 경험 노하우를 나누는 지식 전수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재직 당시 활동했던 분야를 국내와 해외 영업, 관리, 인사, 반도체, TV, 가전, 무선 인터넷 등 13개 분과로 나눠 도움이 필요한 중소기업에 자문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대구 경북 디자인센터에서 `청년 창업 지원 멘토링 자원 봉사`에 나섰다. 20명이 넘는 회원들이 참석해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평가해 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돈도 없고 힘도 없는 퇴임 임원이지만 회사에서 쌓은 노하우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뭉쳐 있다.
최근에는 사회봉사단체의 하나인 JA코리아와 손잡고 초등학교를 위한 `일일 선생님` 활동도 준비 중이다. 이미 경기도 일산 학교에서 20여명이 1차로 강사 교육을 끝마쳤다. 학교에서 요청이 오면 언제든지 강사로 나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르면 다음 달부터 전국의 초등학교를 방문할 계획이다.
봉사 · 기부 활동이 알려지면서 전자사랑모임은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참여 회원 수도 급증하고 있으며 활동이 소원했던 회원들이 다시 모이고 있다. 1000여명의 회원 중 이미 450명가량이 취지에 공감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약속했다. 부부동반 봉사 활동도 준비 중이다. 후배 기업인을 위해 경험과 실패담을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 모임, 퇴임 임원이 활동할 수 있는 재취업 프로그램도 만들어 보자는 건설적인 의견도 쇄도하고 있다.
전자사랑모임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는 성재생 에스에이엠티 회장은 “혜택을 받은 만큼 감사하고 기부하고 봉사하자는 취지”라며 “비록 일개 기업의 사회 환원 활동이지만 사회 곳곳으로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김광호 회장도 “우리나라 기부 문화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개인 중심이기보다는 아직 생색내기나 보여주기식의 회사나 단체 활동”이라며 “전자사랑모임의 작은 봉사 활동이 올바른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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