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 한국EMC 사장(53)은 이른바 ‘스타CEO’와 거리가 멀다. 화려한 말솜씨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화제를 불러 모으는 이슈 메이커도 아니다. 그는 “CEO는 화려한 조명 아래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기업과 직원들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자리”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김 사장에게 ‘CEO는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는 자리’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많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도 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때로는 힘들고, 외롭기도 하지만 그것이 회사와 직원 개개인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CEO의 역할이라는 게 김 사장의 지론이다.
김 사장의 경영원칙은 간단하다.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지속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긴 호흡의 경영이다.
김 사장은 “대다수의 스타 CEO는 언변이 뛰어나고, 단기적인 성과가 뛰어난 경우가 많다. 하지만 CEO의 역할은 기업의 일시적인 성장이 아니라 최소한 30년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원칙은 그대로 성과에 반영됐다. 한국EMC는 국내 외장형 스토리지시스템 시장에서 히타칟HP·IBM 등을 제치고 6년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같은 차원에서 김 사장은 직원들에게도 끊임없이 발전을 요구한다. 김 사장은 무서운 CEO에 가깝다. 다국적 IT기업 한국 지사장 가운데 엄하고 터프한 CEO로 유명하다.
그는 “어느 분야보다 빠르게 변하는 것이 IT업계다. 직원들이 그 변화 속에서 뒤처지지 않고, 10년 뒤 또 다른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CEO로서 직원들의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또한 중요한 역할이다.
한국EMC는 지난 수 년간 본사 차원에서 이뤄진 수많은 인수합병(M&A)으로 인해 조직과 비즈니스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한국EMC 직원들에게도 낯선 비즈니스 모델과 기술에 적응하고, 새로 합류한 피인수 기업 직원들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김 사장은 “회사가 계속 발전하다 보면 직원들도 지치고 피곤하기 마련”이라며 “이는 미국 본사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지사장인 내가 더 많이 노력해서 직원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CEO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반복한 지 어느덧 7년째. 대중적인 스타CEO는 아니지만 EMC 본사 내부에서 김 사장의 가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그는 2008년 7월 본사 부사장으로 임명된데 이어 올 초에는 본사 수석부사장으로 또한번 승진했다. 역대 EMC 아태지역 지사장 가운데 아무도 오르지 못한 자리다.
자연스레 기쁨보다는 부담감이 더 앞선다. 승진 확정 후 미국 본사 부회장과 나눈 통화에서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격려보다는 “앞으로 더 잘 해 달라”는 당부만 여전히 김 사장의 귀를 맴돌고 있다.
수석부사장 승진은 김 사장이 EMC라는 기업의 발전을 함께 하고, 그 과정에서 보다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계기도 됐다.
EMC는 IT업계에서 단일 아이템으로 시작해 ‘종합상사’ 형태로 발전한 몇 안 되는 기업이다. 출발은 스토리지업체였지만 지금의 EMC는 IT인프라 서비스·솔루션업체로 불러야 할 정도로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김 사장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한 기업의 성장 역사를 함께 써나간다는 점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며 “앞으로 EMC의 발전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경진 사장의 얼굴에서 순간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나 지을법한 표정이 나타났다. 앞서 CEO가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는 자리라고 말한 것도 잊은 듯 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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