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 <8> IT강국 한국의 상징어 ‘정보통신’ 83년 처음 사용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8>

전기통신기본법 제정

요즘 ‘정보통신’이라는 말은 일상어(日常語)다. 하지만 지난 한 시절 ‘정보’라는 용어는 일상어가 아니었다. 권력층, 특히 정보기관의 전용어로만 생각했다.

1980년대 초까지 한국에 정보통신이란 단어는 없었다. 대신 ‘데이터 통신’ 또는 ‘자료통신’이란 생경한 용어를 사용했다.

정보통신이란 말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1994년 12월 정보통신부라는 문패를 단 부처도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를 일이다. ‘정보통신’이란 용어는 IT강국 한국이 만든 말이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3년 12월30일. 전기통신기본법에 법률용어로 ‘정보통신’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 시초다.

역사의 커튼을 들쳐 1980년대 초로 돌아가 보자.

새해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는 예나 지금이나 각 부처에겐 최대 숙제다.

업무보고는 부처 장관들이 한 해 동안 역점을 두고 추진할 정책 청사진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다. 업무보고는 장관에 대한 평가 자리이자 경질이냐 유임이냐를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업무보고 시 대통령으로부터 격려나 칭찬을 받으면 그 부처는 앞이 뻥 ?린 고속도로처럼 1년이 순탄하다. 그 반대로 질책이니 지적을 받으면 고달픈 한 해다. 그래서 업무보고를 앞둔 각 부처는 연말부터 비상이 걸린다.

1982년 2월5일, 오전 청와대.

최광수 체신부 장관은 이날 전두환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를 보고했다. 최 장관은 “무선방송과 유선방송의 관리 행정이 체신부와 문공부로 이원해한 것을 체신부로 일원화하고 전파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보고했다. 최 장관은 “현행 전기통신법을 종합 정책기능을 주로 하는 ‘전기통신기본법’과 서비스 이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는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분리해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가 정보통신이란 용어를 만드는 시발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체신부는 그해 1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기존 전무국과 보전국, 계획국을 없애고 통신정책국을 신설했다. 통신정책국은 각종 통신정책 방향을 정하고 대형 개발과제를 진두지휘하는 핵심 부서였다.

초대 국장으로 이해욱씨(체신부차관,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역임)가 임명됐다. 정책국에는 4개 과(課)가 있었다. 이인학 통신기획과장(체신부 통신정책국장, 데이콤 감사역임), 김노철 통신기술과장(한국통신 부사장 역임), 고용갑 통신업무과장(부산체신청장 역임), 박성득 특수통신과장(정통부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 등이 발령을 받았다.

지난 1961년 12월 제정한 전기통신법을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1991년 전기통신사업법으로 개칭)으로 분리, 제정하는 작업은 통신정책국 소관 업무였다.

통신정책국에서 이 일을 당당했던 이인학 과장의 증언.

“한국전기통신공사 민영화 작업에 따른 공사법 제정과 전기통신기본법 개정 작업은 1981년부터 추진했습니다. 당시 전무국에서 이 작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개 법안 개정 작업을 하기가 너무 힘들어 기본법은 뒤로 미룬 상태였습니다. ”

정부는 1982년 1월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를 민영화했다. 이어 그해 3월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 전신, 현 LG유블러스)을 설립했다.

이 과장은 전무국 수석과장으로 있다가 1982년 1월 통신정책국 통신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획과엔 총괄, 제도, 법령, 국제 등 4개 계(係)가 있었다. 송용팔 계장(현 충북대교수)이 총괄을 맡았으나 얼마 후 승진해 나가는 바람에 국제 담당인 서영길 계장(전 TU미디어사장, 현 SKT고문)이 이어받았다.

이 과장의 회고.

“나는 민영화하는 한국전기통신공사로 가기를 희망했습니다. 월급이 많았어요. 그런데 최 장관과 오명 차관(과기부총리 역임, 현 건국대 총장)이 절대 안된다고 했습니다. ”

이 과장은 법안 제정 작업을 법령 담당인 석호익 계장(정통부 정책홍보관리실장,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역임, 현 KT 부회장)에게 맡겼다.

“법안 작업에 따른 지침을 주고 법을 재정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석 계장은 법률개정 전담팀을 꾸렸다. 현업에서 파견 나온 사람과 대학교수 등 5명이 전담팀에 배치됐다. 전담팀은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외국의 법안을 번역해 개정 작업에 참고했다. 국내법도 기본법이란 용어가 들어간 법은 모조리 섭렵했다. 이런 개정 작업을 6개월 가량해 초안을 만들었다.

석 계장의 증언.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큰 애로가 용어였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할 적합한 용어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데이터 통신`이란 말만 있었어요. 이를 ‘자료통신’으로 번역해 사용하기도 했어요.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적합한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적합한 용어 찾기에 나섰고 오래 고민을 했다. 그 결과 ‘정보’와 ‘통신’의 조합을 생각했다. ‘데이터 통신’ 대신 ‘정보통신’이라는 신조어를 찾은 것이다.

석 계장의 이 제안에 대해 이 과장은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거 좋은 용어구먼. 그렇게 합시다.”

석 계장의 말

“그러나 이 말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정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정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정부 기관은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 빼고는 다 한다’는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뿐이었습니다.”

일부에서 이견을 보였으나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과장에게 논리적 타당성을 제공했다.

“정보통신에서 말하는 정보(Information)와 중앙정보부의 정보는 서로 다릅니다. 중앙정보부의 정보는 엄밀히 말해 첩보(Intelligence)인데 첩보부라는 용어는 어감도 좋지 않고 정부 부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그래서 순화시켜 중앙정보부로 한 것입니다. 정보통신의 ‘정보’는 중앙정보부의 ‘정보’와는 분명히 다른 의미라고 설득했습니다”.

그의 이 논리를 바탕으로 이 과장은 이견을 보이던 이들을 설득했다.

이 과장의 말.

“석 계장은 일을 당차게 잘했어요. 내가 내린 지침에다 플러스 알파를 했어요.”

석계장이 맡았던 법안 업무는 법무당당관실에 있던 이성옥 계장(정통부 정보화기획실장,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현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부회장)이 통신기획과로 오면서 넘겨 받았다.

“제가 왔을 당시는 용어와 관련해 이견은 없었어요.”

이 법안은 1983년 말 국회를 통과했다. 기본법은 7장 53개 조문과 부칙으로 만들었다.

‘정보통신’이란 용어를 이 때 처음 전기통신 기본법에 집어넣었다.

이 법안에 대한 이 과장의 평가.

“1961년 제정한 전기통신법은 일본법을 베끼다시피 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은 정보화 사회에 대비해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습니다. 이 법안을 본 일본 우정성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법을 베낀 한국이 자기들보다 더 좋은 법을 만들었겁니다. 법안 초안을 그들이 가지고 갔습니다.”

석호익 KT 부회장의 최근 설명.

“지금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정보통신’이란 용어가 IT인데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공식 용어는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gy)입니다. 바로 우리가 만든 ‘정보통신’을 번역한 것입니다.”

1983년 7월 이해욱 통신정책국장이 체신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하고 그 후임으로 윤동윤 국장(체신부장관 역임, 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이 임명됐다.

윤 국장은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법안을 그해 12월 국회에서 통과시키는데 산파역을 했다. 그의 회고.

“부처 협의 과정에서 관련 부처의 반대가 대단했습니다. 특히 상공부는 법안에 대해 가장 이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윤 국장은 신국환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장(산자부 장관 역임)과 이양순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실 심사분석 국장(감사원 감사위원 역임), 전윤철 총괄과장(감사원장 역임) 등과 서울법대 선후배인 관계여서 이 문제를 원만하게 매듭지었다. 이 국장은 윤 국장의 선배이고 신 국장과 전 과장은 후배였다.

“체신부가 만든 초안의 90%를 반영했습니다.”

그는 4년 이상 최장수 국장으로 일하면서 각종 법령을 재정비해 IT 강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윤 국장은 말도 많고 고비도 많았던 통신 격변기를 소통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훗날 마지막 체신부장관으로서 정보통신부 출범도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윤 장관의 회고(당시 국장).

“통신정책국 사무관들은 모두 유능했습니다. 과장 아래 서영길(전 TU미디어사장, 현 SKT고문), 김창곤(정통부차관 역임, 현 LG고문), 김동수(정통부차관 역임, 현 광장 고문), 최명선(충북체신청장 역임, 현 KAIST교수), 석호익, 이교용(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 우정사업본부장 역임), 이성옥, 구영보(우정사업본부장, 프로그램심의위원장 역임, 현 넷피아 고문), 한춘구(정통부 정보통신지원국장 역임, 현 한국전파기지국 고문) 등이었는데 이들은 일밖에 몰랐어요. 어떤 정책이건 수시로 모여 토론을 했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해 옳다고 생각하면 좀처럼 주장을 굽히지 않았어요. 휴일도 없이 일만 했던 시절입니다.”

‘데이타통신’ ‘자료통신’이란 말 대신 ‘정보통신’이란 용어가 등장한지 올해로 17년 째.

이 말은 IT강국 한국의 또 다른 상징어라고 할 수 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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