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시각장애인 퇴역장교 프랭크는 무의미한 인생에 지쳐서 자살여행을 결심한다. 그는 어리숙한 대학생 찰리를 옆자리에 태우고 페라리의 가속페달을 냅다 밟는다. 프랭크가 운전대를 잡고 뉴욕 거리를 질주하는 동안 찰리는 다급히 방향을 지시한다. 눈이 안 보이는 주인공에게 스포츠카를 모는 경험은 일생일대의 너무도 짜릿한 순간이다. 시각장애인이 차를 모는 영화 속 장면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전망이다.
지난 2005년 미국시각장애인연합(NFB)은 미국 전역의 공과대학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시각장애인도 안전하게 운전이 가능한 자동차를 개발해주시오. 개발비는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소.’
거의 모든 공학자는 시각장애인이 운전하는 차량 개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각장애인단체가 제안한 불가능한 도전과제에 유일하게 대학 연구소 한 곳에서 관심을 보였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나도 자동차를 몰고 다닐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불어넣은 ‘시각장애인 운전자 챌린지’(BDC:Blind Driver Challenge)란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2009년 5월 워싱턴 D.C의 메릴랜드 대학에서는 영화 ‘여인의 향기’의 유명한 드라이브 신,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장면이 재현됐다. 시각장애인 운전사가 탄 자동차가 영화 속의 빨간색 페라리가 아니라 오프로드 주행용 버기카를 개조한 시제차량이란 점이 달랐을 뿐이다.
버지니아 공대 학생들은 저명한 한국계 로봇 공학자인 데니스 홍 교수의 지도로 오프로드 버기카를 개조해 앞을 못 봐도 운전이 가능한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이 차는 레이저 센서와 음성지시 SW, 진동조끼 등을 이용해 시각장애인이 핸들을 얼마나 꺾고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언제 밟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첫 번째 시범운전의 스릴을 만끽한 시각장애인은 NFB에서 나온 두 직원이었다. 시력을 잃고 난생 처음 운전대를 잡아본 그들은 간단한 차량인터페이스 적응훈련을 한 다음 어렵지 않게 시험코스를 무사히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조수석의 승객이 알려주는 지시보다 지능형 차량의 음성지시가 훨씬 정확하고 믿을 만하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시각장애인 운전자 챌린지는 기술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1단계 목표를 거뜬히 통과했다. 이제 눈이 안 보이면 운전을 못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시각장애인 운전의 핵심은 HMI(Human Machine Interface)=시각장애인용 자동차는 미 국방부가 그랜드챌린지대회에서 획득한 무인자동차 기술과 유사점이 많다. 자동차 앞 부분에 차 주변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레이저 거리 센서가 설치되고 차량 뒤에 설치된 컴퓨터는 스캐닝한 지형정보를 분석해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지를 결정한다.
무인자동차와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는 차량운전을 위한 피드백을 기계장치로 대체하는지 사람을 통하는지로 구분된다.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기계장치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무척 다양한 HMI 기술을 활용한다. 음성지시와 조향 인터페이스, 진동조끼는 시각장애인 운전에서 매우 중요한 인터페이스다.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 운전자의 귀에 “직진하세요. 이제 오른쪽으로 한 번 클릭. 다음은 왼쪽으로 네 번 클릭하세요”라는 음성지시가 들리면 핸들이 움직일 때 딸깍거리는 클릭 소리에 따라 주행방향을 적절히 바꿀 수 있다. 운전자가 입는 진동조끼에는 소형 진동모터가 들어 있어 전방에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차량 속도가 너무 빠를 경우 피부를 통해 부르르 떨리는 경고신호를 보낸다.
혹자는 청각, 촉각을 이용한 인터페이스로 운전자의 시각을 대체하긴 어려울 것이란 비관론을 내비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청각과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돼 제반 기술환경을 갖추면 비장애인 못지않게 운전이 가능하다고 BDC팀은 설명한다.
홍 교수는 “앞으로 핸들에 눈금을 매겨서 몇 칸 돌리라고 지시하는 대신 진동장갑, 공기패드를 비롯한 혁신적인 인터페이스로 대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진동장갑은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에 진동모터가 붙은 시각장애인 운전용 장갑이다. 차량의 회전각도에 따라서 손가락에 순서대로 떨림이 느껴진다. 클릭각도로 운전대를 돌릴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유연한 운전이 가능하다. 공기패드는 압축공기로 시각장애인이 이미지를 인식하는 일종의 그림판이다. 여러 개의 바늘구멍에서 나온 공기압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 이미지가 전달된다. 시각을 대체해 차량 주변의 간략한 도로지도를 촉각으로 인식하는 용도로 쓰인다.
◇시각장애인 운전의 미래와 걸림돌=BDC는 오랫동안 시각장애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켰던 거대한 벽 하나를 무너뜨리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시각장애인 운전에 활용되는 HMI 기술은 시각장애인의 자율적 기동성을 한 단계 높이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직업적 가능성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각장애인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 개발은 시력을 갖춘 운전자에게도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기존 자동차는 사람의 시각정보에 맞춰서 반응하는 데 최적화된 구조로 진화해왔다. 따라서 시야 확보가 어려운 야간이나 안개가 낀 날씨에는 위험이 커진다. 운전자가 차량의 음성과 촉각신호로 교통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인터페이스 기술을 완성차 업체가 도입하면 훨씬 더 안전한 도로주행이 가능해진다.
향후 수년 내 시각장애인 운전이 실용화되기 위한 기술적 과제는 교통정보를 보다 상세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해주는 포맷을 확립하는 것이다. 우선은 시각장애인용 자동차가 보다 복잡한 도로환경을 극복하도록 멀티 레이저스캐너의 성능이 한 단계 향상되어야 한다. 커브길의 각도를 알려주는 운전용 햅틱장갑과 여러 개의 공기구멍으로 지도이미지를 전달하는 촉각형 내비게이션도 실용화할 필요가 있다.
버지니아 공대 BDC팀의 다음 목표는 포드의 하이브리드SUV를 개조해 시각장애인이 도로에 나갈 수 있는 진짜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이다.
NFB는 BDC 차량이 완성되면 내년 5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플로리다주 올랜도까지 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전하는 퍼레이드 행사를 개최할 계획다. 외출도 쉽지 않던 시각장애인들이 도로 위로 나가 새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시각장애인 운전이 합법화되려면 각종 기술적 걸림돌 외에 사회인식과 법·제도를 바꾸는 문제가 남아 있다. 자동차면허, 보험제도는 제한된 구역에서 시각장애인의 운전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점차 바뀔 필요가 있다. 점자가 개발되기 전까진 시각장애인이 독서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꿈으로 간주됐던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기존 운전자는 교통안전을 이유로 시각장애인 운전의 합법화에 반감을 표하겠지만 이동의 자유를 갈망해온 시각장애인은 운전면허증은 생존권의 일부라고 주장할 것이다.
BDC의 성공은 시각장애인의 사회적 활동을 촉진시켜 학교와 직장, 슈퍼마켓, 커뮤니티 센터 등 일상 곳곳에서 짙은 선글라스를 낀 이웃과 마주칠 기회를 높인다. 혹자는 100% 자율주행을 하는 무인자동차가 시각장애인에게 더 안전하고 바람직한 탈 것이라고 지적한다.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라. 답이 나온다. 시각장애인은 자동차 운전을 통한 교통편의 못지않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긍심 회복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생전 처음 운전을 해본 이후 터질듯이 기쁨에 겨워하는 시각장애인들의 환한 얼굴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인터뷰:데니스 홍 버지니아 공대교수
“사람들은 승강기 버튼을 누르듯 단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기보다는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자유를 느낍니다. 그건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죠.”
데니스 홍 버지니아 공대 기계공학과 교수(39)는 지난해 미국과학계에서 젊은 천재 10인으로 뽑힌 로봇전문가다. 그는 결국 시각장애인도 자동차를 모는 날이 올 것이며 앞을 못 보면 운전을 할 수 없다는 편견도 바뀔 것이라고 낙관했다.
“시각장애인 운전은 제도적 환경보다 기술 환경이 먼저 달성될 겁니다.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보다 후속조치가 훨씬 더 어려우리라 예상합니다.”
홍 교수는 시각장애인이 집에서 쇼핑센터, 영화관, 학교 등 제한된 구역이라도 혼자서 운전이 가능해지면 장애인의 복지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전망한다. 시각장애인이 운전을 하게 되면 그동안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간주되던 수많은 직업군에 도전할 기회가 열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시각을 대체하는 촉각, 청각 인터페이스 기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 차원에서 정부가 적극 장려해야 합니다. 그동안 정부지원을 받아왔던 장애인들이 직업전선에 투입될 가능성이 열리는 겁니다.”
그는 내년 초까지 실용성을 갖춘 진짜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를 완성할 계획이며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시각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대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어요. 그분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시도가 비록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