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때 안 만들어줘서 제품을 팔지 못하고 있다’ ‘영업부서는 생산 쪽 사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우리 탓이라고만 한다’.
한 회사의 영업부문과 생산부문은 앙숙인 경우가 많다. 예전처럼 영업부문은 제품을 잘 팔고, 제조부문은 제품을 많이, 잘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으로는 무한경쟁 시대에 경쟁우위를 지키기 힘들다. 변덕스럽기까지 한 시장의 요구를 제대로 좇지 못하면 한 순간에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
재료비가 매출의 70∼80%를 차지하는 가전제품의 경우 연간 가격하락률이 30∼40%에 달한다. 변화하는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영업이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이 때 공급망관리(SCM) 혁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판매생산계획(S&OP, Sales & Operation Planning) 프로세스를 잘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동안 주요 대기업 위주로 진행되던 S&OP 활동이 최근 들어 주요 제조업체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S&OP 회의는 판매·생산·영업·마케팅·개발 등 각 담당 임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지난 주 실적을 점검하고 향후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 계획 수립 기간을 가능한 줄이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월간 계획이 아니라 주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최근 제조기업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주 단위 S&OP 회의가 대표적인 예다.
주단위 S&OP회의를 하게 되면, 지난 주에 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이번 주 판매와 생산 계획에 잘 반영하고, 다음 주에 있을 만한 변화를 예측해 이를 금주 판매와 생산 계획을 수립할 때 미리 고려할 수 있다. 통상 1년에 12번(월 단위) 수립하던 판매·생산 계획을 52번(주 단위) 수립하게 됨에 따라 재고와 결품 및 리드타임 등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효과다. 또 이 회의에서 정해진 사항은 심지어 공장의 생산 계획에 그대로 반영된다.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해져가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팔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팔릴지’를 예측하고 △‘빨리 많이 만드는 것’보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수량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S&OP는 이처럼 제조 기업들의 체질을 바꿔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
◇1년에 52번 회의하니…재고가 반으로=전자재료 전문 업체인 두산 전자BG는 올초부터 전 사업부가 매주 하루 반나절을 한 자리에 모여 S&OP 회의를 하고 있다. 가장 먼저 주 단위 S&OP 체제를 가동한 동박적층판(CCL) 사업부의 경우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김학철 BG장을 비롯해 관련 부서 임원과 담당자들까지 한 자리에 모인다. 이 자리에서는 ‘지난 주에 합의한 물량은 왜 팔지 못했거나 왜 생산하지 못했는지’ ‘제조 리드타임이 왜 길어졌는지’ 등 재고·납기 등에 대한 신랄한 문제점 지적과 함께 다음주 계획을 함께 수립한다. 향후 생산계획과 판매계획을 주 단위로 수립한 후 월단위 S&OP 회의에서는 향후 1년치 수요예측을, 주 단위 S&OP에서는 향후 13주치 수요예측을 하고 있다. 차주 1주일치는 일 단위 생산계획도 수립한다.
사실 두산 전자BG는 2007년초 처음 S&OP 프로세스 혁신을 시도하면서 ‘예측하지 않은 물량은 할당하지 않는다(No Forcast, No Allocate)’는 철칙을 세웠다. 하지만 이 원칙을 수립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영업 담당자들은 발을 굴러야 했다. 계획한 대로만 생산하고 판매하는 체제에 익숙치 않다 보니 눈물을 머금고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정확한 수요예측을 하기 위해 정보력을 동원하는 등 진땀도 빼야 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주 단위 S&OP 프로세스 혁신을 추진한 2년 전에 비해 현재 두산 전자BG의 재고량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주 단위 S&OP 회의가 정착되면서 지난해 CCL 제품 재고량은 2007년에 비해 40% 이상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주에 발생한 수요 변동을 금주 생산에 대응할 수 있게 되고, 차주 판매계획도 실제 판매수치에 근접한 정보를 반영함으로써 부실 재고가 눈에 띄게 줄어든 덕이다.
두산 전자BG의 주단위 S&OP 프로세스 혁신이 성과를 거둔 데에는 박성칠 대상주식회사 대표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 박성칠 대표는 김학철 BG장과의 인연으로 매주 두산 전자BG의 S&OP 회의 현장을 찾았던 것이다.
2000년대초 삼성전자의 S&OP 프로세스 혁신을 이끈 박 대표는 이 노하우를 식품회사에 맞게 접목시키며 대상주식회사를 식품업계의 삼성으로 키우기 위한 혹독한 채찍질을 해왔다. 박 대표는 김학철 BG장에게 “고난의 길이니 큰 각오가 없으면 가지 말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 단위 S&OP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반하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상주식회사의 주 단위 S&OP 프로세스 혁신활동은 박 대표가 대상주식회사의 고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2006년에 시작됐다. 현재 대상주식회사는 식품업계에서 가장 빠른 계획과 실행 주기를 자랑한다. 초창기에 많은 직원들이 “제품 종류도 많고 업종도 다른 우리가 삼성전자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볼멘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식품업계 최초로 차주 3일간의 생산물량은 변동할 수 없도록 하는 삼성전자식 ‘3일 확정체제’ 등을 정착시켰다. 식품군의 경우 조미료류, 장류, 레토르트류, 홍초류 제품군으로 구분된 4가지 카테고리관리그룹(CMG)별로 담당자들이 모여 SCM실 주관으로 매주 수·목요일에 모여 차주 판매·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박 대표는 고문 시절에 이룬 성과에 힘입어 지난 2009년 대상주식회사의 대표이사가 됐다.
대상주식회사 관계자는 “주 단위 S&OP 체제가 정착됐다고 판단해 이미 주 2회 계획체제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최근 밝혔다. 이제 2∼3일 단위 시장 변동을 생산에 곧장 반영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3년 전만해도 월 단위로 변동사항을 반영했던 것을 고려하면 시장대응력이 월등하게 유연해졌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CJ제일제당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식품·신선·소재 등 주요 사업부를 기존 월단위에서 주단위 S&OP 회의 체제로 전환했다.
카테고리매니저(CM)별로 S&OP 회의를 통해 매주 생산계획을 확정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수요 공감 프로세스(Demand Consensus Process)를 정립하고 매주 화요일을 ‘영업·마케팅의 날’로 정했다. 판매계획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판매계획을 짜는 영업 담당자와 마케팅 담당자 및 수요계획 수립 담당자(Demand Planner)가 화요일마다 한 자리에 모여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사 이보형 SCM전략파트 부장은 “이 회의에서 도출된 계획이 목∼금요일의 S&OP 회의로 이어져 ‘단일 계획(Single Plan)’에 의해 움직이는 CJ제일제당의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초부터 매주 화요일 ‘글로벌 운영 회의’와 금요일 판매점검 회의 등을 통해 주 단위 S&OP 프로세스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핵심 제품 중 하나인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재고일수를 절반 이하로 줄였다. 해외 법인장과 각 사업부장단이 모두 참여한 이 회의에서 향후 16주 물량을 예측하고 다가오는 한 주에 대해 1일 단위 계획에 3일 확정체제 물량까지 정한다.
박종우 삼성전기 사장이 삼성전자 TV 사업부장 재직 당시 경험을 기반으로 직접 삼성전기의 S&OP 프로세스 확립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초 부임 즉시 매주 사업부장 주관으로 시스템을 활용한 S&OP 회의 프로세스 확립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S&OP 회의에 대한 운영 방법과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 매우 높아 현장에서 직원들에게 “이 용어의 뜻이 무엇이냐”고 전문 용어의 이해도를 묻는 등 학습을 종용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S&OP 혁신을 구심점으로 삼아온 대기업들=삼성전자, 현대기아차 등 대기업들은 이미 2000년 초중반부터 S&OP 프로세스 혁신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
국내에서 비교적 일찍 S&OP 혁신에 앞장서면서 많은 기업들의 ‘속도 경영’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한 삼성전자는 2000년 초중반부터 주 단위 S&OP 체제로 전환을 시도해왔다. 당시 ‘1등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재고가 조금 있는 것이 무슨 문제냐’며 혁신에 볼멘소리를 냈던 삼성전자의 영업 부문에 윤종용 삼성전자 전 부회장은 “국내에서 1등 하려면 재고가 있어도 되지만 글로벌에서 1등 하려면 재고가 없어야 한다”고 화답하며, 정확한 수요예측과 생산확정 체제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획주기 단축을 통해 속도 경영을 실현해 온 삼성전자의 ‘내공’은 거듭된 S&OP 프로세스 혁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 SCM 리서치 업체인 AMR리서치는 지난해 글로벌 SCM 톱25 기업 순위를 발표하며 삼성전자를 7위에 랭크하고 ‘수요예측에 대한 섬광 같은 실행능력으로 세계 최고 수준 S&OP 프로세스를 구현하고 있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채찍질을 해오면서 체질화한 계획과 실행의 짧은 순환 주기를 인정받은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2007년을 기점으로 주 단위 계획물량은 유지하면서 더 나아가 일 단위 변동사항을 반영한 1일∼3일 계획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 중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협력업체에 이르는 공급 부문의 안정화 효율을 높이는 3일 확정 체제 등을 도입해 주 단위 S&OP 프로세스의 실행력을 뒷받침하기도 했다”며 “확정된 계획에 따라 자재를 발주하고 협력업체도 정해진 시간에 납품을 진행, 계획된 수량만 당일에 생산하여 당일에 출하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해외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현대기아차도 글로벌 공급망 강화를 위한 S&OP 회의를 강화하는 데 무게를 싣고 있다. 2005년부터 추진된 SCM 프로세스 혁신의 일환으로 세계 각지의 수요 정보를 토대로 본사의 해외 영업부에서 수요 계획을 확정하고 이 생산량이 월·주 단위 S&OP 회의를 거쳐 각 공장으로 할당돼 생산 일정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최상철 현대기아차 상무는 “시장의 요구를 즉각 수용해 생산과 연계하는 빠른 공급망 체계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총성없는 수요예측 전쟁
‘얼마나 팔릴지 예측하라’
S&OP 혁신을 하는 기업들의 공통된 애로는 수요예측력을 높이는 것이다. 계획한 대로 생산하는 순환 체계를 잘 정착하려면 최초 계획에 해당하는 수요예측치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요예측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재고량 혹은 결품량이 결정된다.
수요예측을 해야 하는 영업부문의 애로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김덕현 두산 전자BG SCM팀장은 “예전에는 재고의 책임이 제조 부문에 있었지만 이제는 영업부문이 책임을 지게 되는만큼 만약 임의 생산 시에는 징계감이 된다”고 말했다. 또 “팔리는대로만 만들다 보니 2주씩 공장을 쉬게 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맡고 있는 사업부문을 옮길 때마다 수요예측 조직을 강화해 왔다. 최 사장은 직접 매주 S&OP회의에 참석해 전세계 법인의 판매와 생산 실적이 표시된 화면을 검토한 후 몇 번의 클릭만으로 어느 법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즉시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LG전자도 최근 몇 년간 영업부문의 수요 관리 프로세스 개선작업에 주력하면서 마켓 센싱을 강화를 위한 CAP(Change Acceleration Program)를 통해 각 법인의 수요예측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전사적 표준화 프로세스 확대 및 인재 역량 강화를 진행하고 있다.
설령 초기 수요예측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아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판매와 생산 체계의 순환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 강제성을 동반하기도 한다. 주단위 S&OP 체제를 확립하고 있는 송재길 두산 전자BG S&OP 팀장은 “틀리든 맞든 때가 되면 모두 계획을 입력하도록 했다”면서 “반드시 계획대로 생산하도록 하고 물량을 예측 안하면 생산량 할당이 없다고 못박았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기업들은 유통업체 및 상위 제조업체들과의 상호공급계획예측프로그램(CPFR)을 통해 일일 판매 상황을 가능한 정확히 집계하고 생산계획을 짜고 있다. 또 소비자의 접점에 있는 완제품 회사에 비해 이들에 제품을 납품해야 하는 부품업체들의 수요예측에 대한 어려움은 더 크다. 이들은 제품을 납품하는 기업의 연구개발(R&D) 정보, 마케팅 정보까지 파악하는 등 고급 정보의 수집을 통한 정확한 수요예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흥옥 삼성전기 정보경영그룹장은 “고객사의 생산계획은 물론 제품 판매 추이, 마케팅 전략, 제품 개발 정보까지 면밀히 파악해 수요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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