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포트] 위협받는 맥주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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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의 하노버 중앙역사에 자리한 한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카일 필립(37) 씨는 “예전만큼 맥주를 많이 마시지 않는다”며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로는 친구들끼리 모여 맥주를 마시는 일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하노버까지 2∼3시간이 걸리는 에센에서 ‘세빗 2010’을 관람하기 위해 왔다는 그는 “맥주 가격이 높아진데다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울 수 없는 등 제약 요건이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고 풀이했다.

 ‘맥주의 왕국’이라는 독일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최근 들어 판매량과 소비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맥주 판매량은 지난 2004년 105억9000만리터에서 2005년 105억4000만리터로 줄었다. 2006년 ‘월드컵 특수’를 맞아 반짝 상승을 했지만 2007년 들어서는 판매량 감소폭이 3억리터에 이르러 본격적인 시장 축소를 예고했다. 2008년에도 역시 9000만리터가 줄어들면서 감소세가 이어졌다.

 독일 국민의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맥주업계에 더 심각한 문제다. 독일 맥주업계의 경우 대기업에서 대량 생산하는 맥주도 많지만 바이젠, 둔켈 등 수없이 많은 하우스맥주가 해당 지역에서 소비되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 내의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맥주 업계에 더욱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독일의 1인당 맥주 소비량은 지난 2004년 연간 116리터에서 지난 2008년에는 111.7리터까지 줄어들었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벡스 등 대표 맥주로 이름을 날린 ‘호프(Hof)의 나라’. 1516년 독일을 지배했던 빌헬름 4세는 “독일에서 생산하는 맥주에는 보리와 호프, 효모, 물 이외의 어떤 것도 넣어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을 공포하면서 독일 맥주의 전통을 세웠다.

 소시지, 학센(돼지고기 요리) 등 독일의 유명한 음식들도 그 풍미가 맥주와 함께 마시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맥주와 잘 어울린다. 또 물에 석회물질이 많이 포함돼 있어 그냥 마실 수 없는 등 물보다 맥주에 더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매년 9월 뮌헨에서 펼쳐지는 옥토버 페스트는 전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맥주 원료 가격의 상승과 소비 환경 변화, 취향 변화 등은 독일 맥주의 명성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독일 맥주의 주원료인 보리의 경우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옥수수나 유채 등의 재배지 증가로 재배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맥주 원료로 쓰이는 맥아의 가격이 연 최고 80% 이상 상승했고 호프의 가격 역시 200% 가까이 올라섰다. 이를 통해 맥주 원료의 가격이 3배까지 상승하는 결과를 맞았다.

 이로 인한 비용의 압박이 전 맥주업계에 타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고 맥주업계는 가격을 올려야 했다. 실제 지난 2008년 맥주 업계는 1상자당 1유로 정도(약 1540원)를 잇달아 인상했다. 하우스 맥주 업체들도 가격을 일제히 올렸다.

 중국이나 인도 등의 소비 수준이 높아지면서 맥주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원료 가격의 폭등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2006년 월드컵 이후 큰 폭으로 시장이 줄어든 것은 ‘금연법’에서 비롯됐다. 지난 2007년 9월 1일부터 공공장소 금연법이 시행, 독일 전역 450여 연방정부 건물 등 공공기관과 버스, 열차 등 대중 교통기관에서 흡연이 전면 금지됐다. 또 니더작센주, 헤센주, 베를린 등 지역에서 식당에서까지 금연조치를 취하면서 타격이 더욱 커졌다.

 카일 필립 씨를 만난 하노버는 니더작센주 소속으로 음식점, 카페 등에서 엄격하게 금연조치가 취해지고 있는 곳이다. 흡연인구가 많은 독일에서 흡연 금지조치가 내려지면서 음식점에서 맥주를 마시고자 하는 욕구가 줄어든 것이다. 이로 인해 폐업하는 음식점도 늘고 있다.

 인구 구성의 변화와 트렌드 변화도 맥주 산업에 위기를 가져왔다. 과거 맥주 소비의 주 고객층이었던 사람들이 노령화되면서 이들의 맥주 소비가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건강에 더욱 민감한 젊은 세대들의 경우에는 맥주와 같은 알콜음료보다 주스, 생수 등 가벼운 음료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환경 문제를 꼽기도 한다. 현재의 기온 상승과 심각한 물 부족 문제로 독일 동부 지역의 많은 유명한 맥주 제조공장의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독일 맥주 산업이 피폐해질 것이란 진단이다.

 이런 맥주 수요의 감소는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 하면 떠오르는 맥주인 ‘벡스’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맥주회사 안호이저 부시(AB) 인베브는 최근 유럽 전역에서 8000명에 달하는 임직원의 약 10%를 감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 세계적으로도 맥주는 사양 산업이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이 될수록 주류 소비는 줄어주는 추세가 뚜렷하다. 이런 이유로 일본 유수의 맥주업체들도 한우물 파기를 오래전에 포기했다. 기린맥주는 지난 1980년대부터 의약업에 진출, 바이오 기업으로 변신했다. 아사히맥주 역시 일찍부터 무알코올 음료, 건강식품업체, 이유식 제조업체들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다양한 시장에 접근하면서 활로를 찾고 있다.

 타임스는 최근 우리 후손들은 옥토버 페스트를 즐길 수 없게 되고 독일 맥주가 결국에는 전설이 될 것이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았다.

  하노버(독일)=황지혜기자 goti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