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가상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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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신체 스포츠가 눈에 띄게 다양해지고 있다. 스크린 골프로 불붙은 몰입형 가상현실(VR) 기반의 스포츠 열기가 사격과 양궁, 야구, 달리기 등 여타 종목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건강을 지키는 스포츠 활동이 가상세계로 이동함에 따라 전자오락과 운동경기의 경계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탕∼타탕, 생각보다 잘 안 맞네.”

 최근 서울 홍대 앞에는 가상 스크린을 향해 사격하는 게임장이 국내 최초로 등장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크린 사격방이 등장한 것이다. 스크린에 뜬 목표물을 향해서 진지하게 총을 쏘는 커플 손님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흔히 사격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사격 시뮬레이터를 개발한 최창호 메듀아이 본부장은 스크린 사격방을 찾는 남녀 고객 비율이 거의 같다고 말한다. 총을 쏴본 적이 없는 여성도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짜릿하게 전해지는 손맛을 한번 느끼면 오히려 남자친구를 끌고 온다는 설명이다.

 BB탄을 쏘는 기존 공기총 사격장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현상이다. 카페를 모방한 업소 분위기 탓인지 여성 고객은 권총을 잡은 자기 모습이 ‘에지’ 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사격 시뮬레이터의 원리는 사실 간단하다. 사용자가 총기를 겨냥하면 적외선 카메라가 스크린에 한 점으로 비치는 조준방향을 측정해서 명중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면 공기압으로 재현된 구경 9㎜ 자동권총의 반동이 그럴싸하게 손목에 느껴진다. 총기 조준 정확성도 수준급이다.

 회사는 지난 10년간 군대, 경찰에 대당 수억원인 고가의 사격훈련용 시뮬레이터를 납품해왔다. 당연히 수요처가 제한돼 일정 이상의 매출 확대는 어려웠다. 회사 측은 군대에서 검증된 가상현실 시뮬레이터를 대중화해 민수시장에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카우보이 결투에서 특공진압작전까지 다양한 가상환경에서 사격게임을 하는 비용은 스테이지당 2000∼3000원. 약 5분간 진행되는 게임에서 평균 100여 발을 쏠 수 있다. 스크린 사격방에서는 내년 초 권총보다 훨씬 강력한 비밀병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묵직한 금속재질에 무게 밸런스까지 실총과 같은 M16 계열의 모의소총을 영업장에 비치할 계획이다. 실탄 발사는 불가능한 구조지만 연사모드로 놓고 드르륵 쐈더니 반동이 세다. 군 시절 사격장의 추억이 머리 속을 스친다.

 회사는 다양한 총기류와 SW 콘텐츠로 훨씬 실감나는 모의사격 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벌써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6곳에서 스크린 사격방이 개장을 준비 중이다.

 넥스팝을 비롯해 군사용 시뮬레이터를 개발하는 경쟁사 두 곳도 유사한 컨셉트의 스크린 사격방 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KT는 원통형 스크린으로 몰입감을 한층 높인 사격시뮬레이터(모델명 VR슈팅)를 새로운 사업 콘텐츠로 개발 중이다. 머지않아 양손에 기관총을 들고 밀림 속 적들에게 총알을 퍼붓는 영화 람보의 액션장면도 가상 체험코스로 등장할 것이다. 회사원들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미운 상사의 얼굴을 닮은 아바타를 쏘면서 내기를 할지도 모른다. 스크린 골프에 이어 사격종목도 몰입형 가상 스포츠로 탈바꿈하면서 우리 곁에 한층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스크린 야구와 활쏘기, 마라톤=야구와 같은 구기종목도 가상 스포츠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대전에는 국내 최초로 스크린을 이용한 야구연습장이 들어섰다. 스크린 야구는 고객이 타석에 들어서면 멀리 스크린에 투수의 투구 동작이 비쳐진 다음 피칭기계에서 야구공이 튀어나온다. 공을 쳐내는 고객은 투수의 와인드업 동작에 따라 구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집중도가 훨씬 높아진다. 볼을 치면 즉시 안타, 홈런과 같은 타격 판정까지 자동으로 이뤄진다. 뛰어난 사실성 덕분에 하루 평균 300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콘텐츠가 더 개선되면 WBC에 나간 국가대표처럼 박찬호, 봉중근, 마쓰자카 같은 일급 투수를 골라가면서 독특한 구질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끄는 스크린 야구 시뮬레이터는 최근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관련업체들이 가맹점 모집에 나섰다.

 스크린 사격에 이어 스크린 양궁도 내년 초 등장할 전망이다. 알디텍은 국내 최초로 스크린 양궁방 사업에 나설 계획이다.

 회사는 양궁 선수의 경기력을 높이는 자세, 탄도분석기술을 응용해서 양궁 시뮬레이터를 개발했다. 스크린에 비치는 목표물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겨 쏘면 반동은 느끼지만 실제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전방의 대형 스크린에는 활의 장력과 방향 등으로 분석한 비행궤적에 따라 화살이 정확히 꽂힌다. 회사 측은 전통적인 양궁시합 외에 들판에서 짐승을 잡는 사냥용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시뮬레이션 환경을 도입할 계획이다.

 마라톤도 가상세계와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가미테크는 세계 최초로 원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도 달리기 경기를 할 수 있는 마라톤 시뮬레이터, 즉 스크린 러닝머신을 이달 말 출시한다. 사용자가 러닝머신 위에서 뛰면 속도에 따라서 시야를 꽉 채우는 원통형 스크린에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신기할 것이 없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보면 가상의 아바타들이 당신과 나란히 뛰는 모습이 스크린 풍경에 겹쳐서 보인다. 각 아바타는 지금 다른 스포츠센터에서 뛰고 있는 누군가의 분신이다. 뛰는 속도를 줄이면 가상의 아바타도 속도를 늦추다가 결국 뒤로 처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 러닝머신 위에서 혼자 TV만 보고 뛰는 것이 아니다. 함께 운동하는 사람끼리 경쟁심리를 북돋우는 사이버 마라톤 환경을 만드는 셈이다.

 가상 스포츠의 원조격인 스크린 골프의 가상현실(VR)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산 M시티에는 주민체육시설로 길이 20m의 초대형 스크린을 갖춘 골프장이 들어서고 있다. 5개의 고성능 프로젝터가 구역별로 비추는 스크린 골프장의 풍경은 초고선명(UD)급 화질이라서 착시현상을 일으킬 정도다.

 ◇가상 스포츠의 미래=다양한 스포츠 분야가 가상세계에 앞다퉈 진출하는 이유는 지난 몇 년 사이 스크린 골프 시장의 폭발적 성장세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크린 골프는 전국 매장 수가 4500여곳으로 급증했고 장비와 서비스매출을 포함한 전체 시장규모는 연간 7000억원이 넘는다. 전국 어디서나 대형 스크린과 고화질 프로젝터, 동작인식 센서, 광네트워크 등 첨단장비를 갖춘 가상 스포츠 체육시설을 만날 수 있다. 세계 어디도 없는 방대한 가상 스포츠 인프라를 불과 3∼4년 만에 갖춘 것이다. 덕분에 사격·야구·농구·마라톤 등도 본격적인 가상 스포츠로 진화할 기회를 맞게 됐다.

 하지만 스크린 골프의 성공신화가 여타 스포츠 분야에서 재현될 것이라고 무조건 낙관하는 것은 위험하다. 골프가 가상 스포츠로 성공한 배경은 늘어나는 골프인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골프장의 괴리를 스크린 골프가 채워줬기 때문이다. 뛰어난 골프실력이 인적 네트워크 구축에 요긴한 도구로 작용하는 한국사회의 특수성도 스크린 골프의 폭발적 인기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 골프를 제외한 여타 스포츠는 오락성 측면을 제외하면 아직은 값비싼 장비를 이용해 가상세계로 진입해야 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활을 잘 쏘고 사격 솜씨가 뛰어난 것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겠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 큰 자랑거리는 아니다. 갓 입사한 여직원이 회식이 끝난 후 사격방에서 귀신 같은 총 솜씨로 부서원들을 모두 쓰러뜨려도 업무능력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김 부장은 골프실력이 싱글이다’는 평가는 사회적 위상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 유독 스크린 골프란 가상 스포츠가 인기를 끄는 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존경하는 풍토가 남아 있는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는 스크린 골프가 아니라 스크린 양궁이 훨씬 더 인기를 끌 것이다.

 가상 스포츠의 상업적 성공은 실제 운동환경을 재현하는 기술력보다 현실세계에서 해당 운동종목이 가진 대중적 이미지나 문화적 자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현실에서 심심한 스포츠 경기는 사이버 공간에 옮겨놓아도 똑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가장 좋은 해법은 상상력이다. 스크린 사격은 서든어택 같은 1인칭 슈팅게임이나 논산 훈련소 사격장을 재현하는 식으로 분명한 스토리를 전달해야 한다. 스크린 활쏘기도 단순히 표적 맞히기나 동물사냥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호위무사가 돼 암살자를 물리치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라. 가상 스포츠의 목적이 단지 운동효과라면 그냥 나가서 뛰는 편이 훨씬 낫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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