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에 죽고 산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이 TV를 살 때 고민은 간단했다. ‘소니를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을 살 것인가.’
요즘도 미국인들의 TV 구매 패턴은 비슷하다. 다만 ‘소니’ 대신 ‘삼성’이라는 브랜드만 바뀌었을 뿐이다. 브라운관 TV시대의 절대강자인 소니가 첨단 LCD TV 연구·개발에 등한 시 한 결과다.
필름 시장의 강자였던 코닥과 아그파필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유명한 일화다.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다가왔지만, 이들은 첨단 기술에 무감각했다.
조그만 기술의 차이가 기업과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시대다. 세계 각국이 디지털 시대의 ‘글로벌 패권(覇權)’을 차지하기 위해 질주하면서 ‘기술 승부’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누가 미래에 더 많이 투자했는지, 예전에는 10년이 지나야 알 수 있었지만 이젠 3년도 안돼 판가름난다. 더구나 이긴 자가 시장을 독차지하는 냉혹한 ‘승자 독식의 시대’도 열리고 있다.
7번의 연기 끝에 발사한 나로호는 결국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7년간 5100억원을 들여 추진한 프로젝트의 결과치고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이번 나로호 발사 실패는 첨단 기술 개발이 얼마나 힘든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러시아에 기댄 우리 우주 기술력의 한계도 실감했다.
하지만 기술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뒤진 분야는 빨리 따라 잡고, 앞선 분야는 한발 더 앞서 치고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산업화에 뒤졌지만 정보화에서 기술 리더십을 확보한 저력이 있다. 가장 앞선 인터넷 인프라와 통신 환경은 여전히 전세계 벤치마킹 대상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소자 산업에서 디지털TV·휴대폰 등 완제품 산업까지 세계를 호령한다.
문제는 잠시도 한 눈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해외 각국이 우리보다 빠른 속도로 IT 인프라 구축경쟁에 나서면서 ‘코리아 프리미엄’도 급속히 약화되는 추세다.
융합(컨버전스)을 화두로 한 시장과 기술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이종 산업간 결합은 물론 이종 기업과 협업이 자연스러운 이른바 ‘컨버전스 2.0’ 시대가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IT 경쟁력이 인프라 구축에서 나왔다면, 이젠 이를 다양한 산업에 접목시키고 활용하는 싸움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 2∼3년간 소비자들은 ‘디지털 TV’가 구현하는 화질·음향 등 하드웨어 스펙에 열광했다. 하지만 이젠 인터넷과 연결된 양방향 ‘IPTV’에 관심이 쏠리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이마저도 머지않아 ‘향기나는 TV’와 같이 오감을 자극하는 스마트미디어로 취향이 바뀔 것으로 전망한다. LCD TV 절대강자로 떠오른 삼성도 스마트미디어 시대에서는 자칫 소니처럼 뒤처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비단 TV뿐만이 아니다. 혈관을 청소하는 로봇, 안경없이 보는 3차원 영상, 디지털군복, 가상현실시스템, 전자종이 등 바이오·콘텐츠·로봇·헬스케어·디스플레이 등 각 분야에서 첨단 컨버전스 기술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앞으로 산업내·간 융합(Convergence), 네트워크간 융합(Ubiquitous), 인간과 IT의 융합(Organic IT) 등 크게 3가지 줄기로 컨버전스가 빠르게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미 산업간 컨버전스와 유비쿼터스 컴퓨팅은 각각 이종산업의 협업, 클라우드 컴퓨팅 등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MIT 닐 거센필드 박사는 좀 더 먼 미래 기술인 인간과 IT의 융합에 대해서도 “21세기 중반쯤이면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는 컴퓨터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컨버전스로 기술이 갈수록 첨단화하면서 비교우위를 갖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부단히 노력하고 도전하는 방법밖에 왕도는 없다. 열정을 가지면 실마리는 의외로 쉽게 풀리기도 한다.
일본 혼다 창업주인 혼다 소이치로가 유럽 각국의 공장을 시찰하는 여행에서 한 개의 십자나사못을 주워온 일화는 유명하다. 그 때까지 일자나사못 밖에 없어 일일이 손으로 나사를 조은 혼다는 십자나사못의 발견으로 기계로 나사를 조을 수 있게 됐다. 결국 생산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오늘날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했다.
‘일자’에서 ‘십자’라는 조그만 아이디어 하나가 급격한 기술진보를 가져왔다. 여기에는 CEO가 직접 해외의 앞선 기술을 일일이 시찰할 정도로 기술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술 패러다임의 대전환기, 죽고 사는 ‘소리없는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미래 기술 개발에 열정을 가진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 쇳덩이를 갈아서 가느다란 바늘을 만들고, 큰 돌덩이를 갈아 얇은 안경알을 만들 듯, ‘기술 한국’의 경쟁력을 다시 갈고 닦아야 할 때다.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