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편파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기능’이란 단어는 구시대의 토론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도피와 현실인식과 개혁의지와 예술성의 진부한 싸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문화의 순수성과 유희성을 강조하는 이들이라면 기능이란 말을 듣는 순간부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특히 SF를 아끼는 이들에게는 그 씁쓸함이 더욱 남다르다. SF에 익숙하지 않은 일단의 국내 과학자나 문화계 인사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기능성 장르로 SF를 잘못 소개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SF에는 기능, 또는 역할이 있다. 미래의 기술을 논하는 것은 그 역할 가운데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선 다른 문화 생산품이 가지는 모든 기능을 SF도 담고 있다. 허구가 본질적으로 지니는 유희성,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보고 재인식하도록 만드는 기능, 풍자, 내적인 완성도와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학적, 시각적 예술성 등. 하지만 SF에는 여타 장르가 따라오지 못하는 또 하나의 기능이 있다. 우리 자신, 즉 인간 존재의 변화를 탐색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술은 더 이상 편리를 위한 도구만을 만드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상과 외부환경의 정의 자체를 바꾼다. 인터넷과 무선 통신망이 고전적인 소통과 자기표현을 어떻게 바꿨는지 차근히 살펴보자.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그 제약의 대부분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자. 우주 개발은 또 어떤가. 인류가 달에 오른 업적은 신화나 동화를 현실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이제 인류의 눈과 손이 태양계를 넘어 은하계로 뻗어나간다고 상상해보자.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금의 우리는 200년 전의 사람들과 (문자 그대로)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200년 후의 인간들 역시 지금의 우리와는 이질적인 존재일 것이다.
리처드 모건의 ‘얼터드 카본(Altered Carbon)’은 100년 뒤의 미래를 그리는 하드보일드 SF다. 이 소설의 말초적인 재미는 지배층의 횡포에 저항하는 약자들의 활약과 복수극에 따라붙는 폭력에 있다. 하지만 그처럼 달콤한 당의가 둘러싸고 있는 알맹이는 바로 ‘완전히 달라진’ 우리의 모습이다. 얼터드 카본의 세계에서는 인공지능이 네트워크 속의 생물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인간은 데이터 형태로 항성계 사이를 여행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의 육체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의 육신과 자아는 일치하지 않는다. 영생은 현실적으로 구현된 상태며, 주인공은 데이터 놀음을 통해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든다.
이 두 번째 자아는 복제의 순간에서 첫 번째와 완전히 동일하며, 다른 육체에 들어간 후에는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두 주인공은 모든 골칫거리를 해결하고 나서 누가 계속 남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 고민 또한 약물의 도움을 받아 감정적인 오류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전통적인 인간상이나 그 속에 들어 있던 고뇌는 절반 정도 사라져 버린다. 즉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고전적인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SF에 담겨 있는 최고의 기능이다. 내부를 탐색하기보다 바깥을 살피고 상상하는 것. 하지만 그 바깥이란 환경이 아니라 달라지고 새로 태어난 우리들 자신이다. 발달한 기술이 궁극적으로 세계와 동일해지면 나의 내부와 외부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그려보고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SF만이 해낼 수 있는 기능이다. 김창규 SF작가 sophidia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