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각) 0시, 미국 1700여개 방송사의 아날로그 방송 신호가 일제히 중단됐다. 그 대신 종전보다 훨씬 선명한 TV 화면을 제공하는 디지털 신호가 미 전역으로 송출됐다. 세계 최초로 미국이 디지털 TV로 완전 전환한 역사적 순간이다.
일단 디지털TV 전환은 순조롭게 진행됐다는 평이다. 이날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마이클 콥스 위원장 대행은 “DTV 전환이라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통해 고품질 프로그램 시청은 물론이고 다양한 무선통신 서비스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됐다”며 “일부 전환 준비를 하지 못한 가구들에도 최선의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5년이 넘는 준비 기간 동안 전환 시점을 연기하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이를 실행에 옮겼지만 예상대로 이를 둘러싼 잡음도 적지 않았다. 오는 2012년 지상파 DTV 전환을 앞둔 우리나라에 던지는 시사점은 남다르다.
◇4개월 유예기간, 200% 활용=TV·안테나·디지털컨버터박스 등 관련 가전 업체에도 이번 DTV 전환은 엄청난 수혜였다. 미 소비자가전협회에 따르면 올들어 TV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2%나 급증했다. 미 정부도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DTV 전환에 투입된 예산은 부시 행정부 시절 할당된 예산을 포함해 총 20억달러였지만 FCC는 이미 700㎒ 주파수 대역 경매를 통해 196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지난 2월, 6월로 전환 시점을 연기한 이후 FCC는 시민단체 자원봉사자는 물론 심지어 소방대원까지 동원해 시민들이 컨버터 박스와 안테나를 구매, 설치하는 것을 도왔다. 의회도 이미 DTV에 할당된 15억달러(1조8783억원) 외에 6억5000만달러의 현금을 추가로 지원했다. 상무부는 이중 대부분을 디지털 셋톱박스 구매용 쿠폰 발행에 할당했다.
◇한 번 연기론 부족(?)=닐슨에 따르면 정부의 노력으로 DTV 전환 준비가 덜 된 가구 수는 지난 2월에 비해 절반 가량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시행 초기에 다소 혼선이 불가피하다는 당초의 우려 대로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닐슨에 따르면 12일 현재 미국내 280만 가구가 여전히 DTV 전환에 무방비 상태다. TV 시청자의 2.5%에 해당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무려 900만 가구가 위성이나 케이블TV에 가입했어도 유료TV와 연결되지 않은 부엌·침실에 비치된 TV로는 DTV를 볼 수 없는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FCC는 전환 직전 DTV 전환에 취약한 지역이 49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뉴욕·로스앤젤레스·시카고·필라델피아·보스턴 등 주요 대도시가 포함됐다. 이들 도시의 저소득층이나 서부 농촌 지역의 시청자들은 DTV 전환으로 인한 피해자가 된 셈이다. 심지어 정부 관계자들조차 “이미 컨버터 박스와 안테나를 구매한 시청자들도 여전히 수신 불량 등 장애를 경험한다”고 인정했다. 거주 지역에 맞지 않는 안테나를 골랐거나 잘못 설치했기 때문이다. 또 아날로그 신호와 다른 디지털 신호의 전송 성질이 있는데다 방송사들이 빈 주파수로 디지털 채널을 옮기는 과정 속에서 디지털 채널 수신이 원활하지 못한 사례도 속속 등장했다. 이에 따라 12일 이전에 DTV 전환을 시행한 방송 지역에선 컨버터 박스를 한 번 더 스캔(rescan)해줘야 했다.
◇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5년 넘게 준비를 했어도 매끄럽지 못한 미국의 지상파 DTV 전환 과정은 우리 정부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난 1997년 당시 정보통신부가 DTV 전송방식을 미국식으로 결정하면서 출발선에 섰지만 미국식과 유럽식 전송방식을 놓고 2004년까지 지리한 싸움을 벌였다. 지난 11일 정부가 내놓은 디지털 전환을 위한 4단계 추진 전략을 놓고도 아직까지 최종 종료 시점이나 방법 등이 정해지지 않았다. 지상파 방송사는 투자 부담이 크다며 전환에 소극적이다.
이에 따라 2012년까지 정부와 업계가 후속 조치를 포함해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 전체 가구의 70%에 해당하는 가정에 방송을 내보내는 수백개 방송사들은 전환 이후 2주∼4주간 긴급 재난 방송이나 DTV 전환 안내방송용으로 일명 ‘아날로그 나이트라이트(nightlight)’라는 별도 아날로그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DTV 전환 이후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FCC는 4000만달러를 들여 콜센터 4000여개를 설치했다. 40달러짜리 쿠폰을 가구당 최대 2장까지 지급하는 프로그램도 7월 말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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