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피해자는 `상처만`
지난해 벌어진 ‘스티마’ 사건은 아직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SW) 기업들에 큰 아픔으로 기억된다. 지식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올 수 있는지 보여줬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지식재산권 보호에는 큰 역할을 했다.
‘스티마’ 사건의 학습 효과 때문일까. 최근 티맥스소프트와 큐로컴의 싸움에 당사자들이 아닌 유관기업(수요기업)이 더욱 부산을 떨었다.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해 사건의 파장은 어떨지 파악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지식재산권의 특성상 복제나 도용 등 직접 침해를 하지 않았으나 이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면서도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3회에 걸쳐 집중 분석한다.
#1. 5월 27일. 서울 고등법원 민사 4부는 파이낸셜네트워크서비스(FNS)-큐로컴-티맥스 간에 벌어진 소송에 판결을 내렸다. 이후 관련 기업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금융계 한 인사는 기자에게까지 어떤 파장이 있을지 묻는 등 향후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2주 후 판결문이 도착하자 큐로컴은 대대적으로 신문 지면에 광고를 실어 내용을 알렸다. 이에 티맥스소프트는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것도 이 사건이 가져올 수 있는 파장 때문이었다.
#2. 올 초, 국내 한 전자기기 제조사 A. 공개 소프트웨어(SW)의 소스코드를 무단으로 복제해 개발한 부품을 A사가 사용한 흔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물론 그 부품은 A사가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A는 이 일이 커질 것이 두려워 상당 금액의 합의금을 지급해야만 했다. 문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회사는 모든 부품이나 SW를 직접 개발해 쓸 수도 없고 불안하기만 하다.
#3. 반도체 장비 기업 C. 4년 5개월간에 걸친 장기간의 특허 소송 끝에 승리했지만,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소송 기간 고객들이 행여나 불똥이 튈까 두려워 자사의 제품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만도 하지만, 피해액이 얼마가 될 지 증명할 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대한민국 기업들이 지식재산권 분쟁으로 멍들고 있다. 특허권이나 저작권과 같은 지식재산권은 눈에 보이지 않은 창작과 기술 개발에 정당한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권리다. 산업과 문화 발전을 위해 반드시 보호돼야 할 권리다. 그렇지만 예상치 않게 기업 흠집 내기용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발생한다. 2∼3년은 기본이라는 장기적인 소송 때문에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기업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한다.
게다가 기나긴 소송 과정을 겪어야 하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이들의 제품을 구입한 고객까지 피해를 겪는다. SW는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29조에는 ‘사정을 알고서’라는 단서를 명확하게 달고 있지만, 침해할 우려가 있다면 이를 정지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객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고객들은 소송에 걸린 제품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스티마 저작권 문제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던 대기업은 인지 사실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에 연루되는 피해를 봤다. 경찰조사로 인해 대표이사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충격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혹시 자사가 이용하는 제품이 지식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문제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너무 가혹한 처사다. 책임은 묻지 않게 된다고 해도 ‘문제 있는 기업’으로 인식될 수 있는데다 경영 활동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된다.
특허 분쟁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심결취소 소송과 침해 소송이 이원화돼 시간과 자원이 낭비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두 재판의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올 때 혼란까지 일어난다. 기술 유출에 관한 재판은 재판 기간이 길어지면서 유출된 기술정보가 계속 사용될 수도 있다. 피해가 점점 커지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반도체 분야는 이미지 훼손의 목적을 숨긴 채 고의적으로 특허 소송을 거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특허 소송은 용두사미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소송기간에 신뢰도가 하락해 고객을 놓치게 되는 일도 많았다.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해 줄 만한 제도도 마땅치 않고, 이로 인해 발생한 손해 배상액을 산정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지난 10일, 여의도연구소(소장 진수희)와 한국지식재산연구원이 ‘특허분쟁 장기화, 기업은 골병든다’를 주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식재산토론회를 열었다. 진수희 여의도연구소장은“우리나라는 지식기반사회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법·제도적 인프라를 아직 갖추지 못했다”며 “대한민국의 선진경제 진입을 위해서라도 신속정확한 지식재산권 분쟁해결로 기업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선진국 수준의 지식재산 사법제도가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