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크리시대, 산업지형이 바뀐다](1)팔수록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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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화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수입업체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주말을 맞아 명동의 디지털제품 매장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전을 했을 경우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살펴보며 상품구매를 고민하고 있다. 정동수기자 dsch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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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율이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1600원까지 육박하는 등 ‘고공 점프’ 중이다. 환율이 요동치면서 쇼크 수준의 환율을 뜻하는 ‘환율 크리(critical)’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기업은 죽을 맛이다. 불황으로 시장이 한겨울인 상황에서 가격까지 흔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환율에 따른 뒤바뀐 시장 현황과 전망을 5회에 걸쳐 집중 점검해 본다.

 프린터를 수입해 파는 A사 마케팅 임원은 며칠째 밤잠을 설친다. 불면증의 주범은 ‘고환율’이다. 지난해 말 1500원까지 반등할 때 만해도 올해 초면 진정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상황이 정반대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환율 인상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저 넋 놓고 환율 시세만 바라보는 게 전부다.

제품 가격을 놓고 전자업계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올해 들어 1500원대 후반으로 환율이 ‘고공행진’하면서 지난해 말 수립한 가격 정책이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PC 주변기기를 수입해 판매하는 벨킨코리아 이혁준 사장은 “올 1분기 1300원에 맞춰 경영 계획을 수립했다. 단순 비교해도 지금과 25% 이상 차이가 난다. 일부 재고 제품으로 그나마 환율 인상분을 흡수하지만 한계가 있다. 밑지면서 판다는 말이 정답이다. 처음에는 경기 등을 감안해 가격을 인상하지 않을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적절한 가격 인상 ‘타이밍’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수입 비중이 큰 업체는 이미 고환율을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가격을 인상했다. 경기 불황에 위축된 소비심리까지, 시장 상황이 최악이지만 가격 인상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재고’를 떠안은 업체가 행복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환율을 관망하는 다른 업체도 ‘적절한’ 인상 시점만 고민중이다.

국내서 가격 인상은 이미 대세로 굳어졌다. TV·프린터·캠코더·노트북 등 대부분의 전자제품 가격이 한 두 달 사이에 ‘소리 소문 없이’ 올랐다. 캐논은 렌즈와 필터 등 카메라 제품 가격을 평균 15% 가량 인상했다. 니콘코리아도 카메라 액세서리를 중심으로 10∼15% 정도 가격을 인상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를 끌던 넷북도 국내외 브랜드를 망라하고 최고 20%까지 조정됐다. 델은 지난해 하반기 65만원 정도에 판매하던 12인치 넷북 가격을 지난달 79만원으로 20% 이상 올렸다.

가격이 오르면서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리는 제품이 오히려 다른 나라 할인 가격보다 싼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가격 비교 사이트 다나와 기준으로 124만∼147만원에 팔리는 LG전자 엑스캔버스 42인치 풀HD급 ‘42LG50’ 모델은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업체 ‘베스트바이’ 정상 등록 가격은 1200달러, 최저 할인가격은 1000달러다. 삼성전자 파브 46인치 풀HD급 LCD TV LN46A550P1F 모델도 국내 가격은 186만∼209만원인 데 비해, 미국에서는 각각 정상가 1500달러(233만원), 할인가 1300달러(202만원)에 팔리고 있다. 국내 최고 가격이 미국 할인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LG전자 관계자는 “과거 환율이 낮을 때는 미국·유럽 등 해외 시장이 워낙 취급 규모도 크고 유통망도 발달해 같은 제품이라도 국내보다 쌌다”며 “그러나 지난해 말 이후 원화 가치 급락과 함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고환율로 주요 IT·전자업체는 ‘개점 휴업’과 ‘가격 인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환율크리란=환율에다 ‘중대한’이라는 뜻 외에 ‘위험한 또는 위기의’라는 뜻도 있는 영어 단어 ‘크리티컬(critical)’을 합친 용어다. 환율의 급상승으로 컴퓨터 부품과 완제품 가격이 높게 올라 구매와 수급에 위험을 감수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컴퓨터 부품 구입자들이 곧잘 쓴다.

강병준·이성현기자 bjk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