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햅틱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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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일수록 대중은 옛 것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느낀다. 햅틱(haptic)은 화려한 시각정보에 매몰된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 시대의 익숙한 손맛을 되살려주는 퇴행성 첨단기술이다. 지난해 휴대폰 시장을 강타한 햅틱 열풍은 올해 들어 자동차, 마우스, 수술기구 등 훨씬 다양한 분야에서 익숙한 얼굴을 내밀 전망이다. 햅틱의 미래는 오래된 아날로그의 추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치맛단이 올라갔다 내려오는 패션업계의 복고풍 트렌드와도 흡사하다. 올해 IT시장에서 유행할 복고풍 패션, 햅틱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햅틱, 어느 별에서 왔니?

 햅틱은 ‘촉각의, 만지는’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며 그리스어 ‘haptesthai’에서 어원이 나왔다. 햅틱기술은 사람이 피부로 세상을 느끼는 두 방식, ‘힘 피드백’과 ‘촉각 피드백’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물체의 힘을 재생하는 힘 피드백(force feedback) 기술은 기계적 인터페이스를 이용해 사용자에게 힘과 운동감을 느끼도록 하는 원리로 작동한다. 로봇기술자들이 1950년대 중반 원자로 작업로봇의 원격제어를 위해서 처음 개발했다. 요즘 나오는 원격작업로봇은 햅틱 장갑을 끼고서 멀리 떨어진 물체의 형상과 움직임, 무게, 굳기 등을 느끼면서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다.

 이와 달리 물체의 표면촉감을 구현하는 촉각 피드백은 매끈하고 거친 질감, 무늬패턴, 온도 등의 자극을 피부에 가해서 가상의 물체를 쓰다듬는 느낌을 재생한다. 포스 피드백에 비해서 연구수준이 초기 단계인 촉각 피드백이 가장 많이 활용되는 곳은 의학 분야다. 의료 분야에서 햅틱기술은 수술 훈련장치로 불리는 의료 시뮬레이터에 적용돼 의료기술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이머전사가 개발한 복강경 수술 시뮬레이터는 수술 시 의사의 손에 전해지는 촉감을 전달하기 위해 압축 공기, 소형모터 등의 기계장치로 기계 수용기를 이용해 실제로 피부 조직을 다루는 것과 유사한 환경을 구현하게 된다.

 햅틱기술은 완벽한 가상현실을 추구하는 게임기 시장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두각을 나타냈다. 1983년 ACRL(Atari Cambridge Reserch Lab)은 게임 상황에 따라서 진동이 발생하는 2D 포스 피드백 조이스틱을 개발한다. 이 기술은 아타리가 세계 최초로 진동 운전대를 이용한 자동차 게임을 제작하는 기반기술이 돼 대박을 터뜨린다. 시청각 정보에 의존하던 게임기 시장에서 촉각을 이용한 신선한 자극에 게이머들은 열광했다. 요즘은 놀이동산에서 아이맥스 영화장면에 맞춰서 흔들리는 의자는 기본이고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의 위(Wii)와 같은 보급형 게임기도 햅틱기술을 접목해서 사용자가 실제로 플레이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게임기와 함께 햅틱기술이 대중적 파급효과를 미친 분야는 통신산업이다. 한국 대중이 최초로 햅틱기술을 실감한 것은 1980년대 보급된 ‘삐삐(beeper)’에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초창기 삐삐는 주머니 속에서 부르르 떠는 진동모드 하나밖에 없었지만 1993년에 등장한 모토로라 신형 삐삐는 무려 9가지 진동을 제공했다. 진동모터의 회전속도에 그 나름대로 메시지를 담아낸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2007년 휴대폰과 터치스크린의 조합(터치폰)이 본격화되면서 햅틱기술은 화려하게 날개를 편다. 터치폰은 그래픽 메뉴의 변화로 무한히 다양한 입력환경이 가능했지만 기존 키패드에 비해서 제대로 눌렀는지 확인이 어렵고 작동 에러율이 높은 단점이 있었다. 햅틱기술은 터치스크린을 누를 때마다 아날로그 키패드를 딸깍거리는 촉각을 흡사하게 복제해서 에러율을 낮췄다. 게다가 터치폰에 새로운 메뉴를 끌어오거나 입력을 할 때 손끝에서 수십 가지의 맞춤형 햅틱 진동을 느끼게 했다. 한국 휴대폰 업계는 햅틱기술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유럽, 미국보다 훨씬 앞서 도입했다.

 2007년 LG전자의 프라다가 풀스크린 터치폰에 최초로 햅틱기술을 도입했고 이듬해 초 삼성전자의 햅틱 휴대폰 시리즈의 인기폭발로 세계 휴대폰시장에서 햅틱기술의 도입은 돌이킬 수 없는 트렌드가 됐다.

 자동차 분야에도 햅틱기술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BMW는 5∼7시리즈에 햅틱 다이얼 스위치 ‘아이드라이브(iDrive)’를 채택했다. 운전자가 햅틱 스위치를 돌리면 기능별로 전혀 다른 촉각, 예를 들어 에어컨을 조절할 때는 드르륵, AV장치를 선택할 때는 딸깍딸깍거리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전방 교통에서 눈을 떼지 않고도 자동차 내 대부분의 장치를 조그마한 다이얼 하나로 조작할 수 있다.

 ◇뉴미디어로 진화하는 햅틱의 미래

 햅틱기술은 그동안 모터를 이용한 압력(힘)과 진동신호(촉각)를 적절히 이용해서 피부 촉각차원의 가상현실(VR)을 구현해왔다. 최근 햅틱기술을 구현하는 데 진동모터가 아닌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고 있다. 일본의 한 연구팀은 초음파를 이용해 허공에 가상의 형체를 구현하고 이를 사람이 느낄수 있도록 한 시스템을 개발했다. 국내 연구진도 특수처리한 고무표면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닭살 같은 돌기가 튀어나오는 촉각 햅틱기술을 개발하고 특허출원을 진행 중이다. 머지않아 허공에 뜬 홀로그래픽 화면에 손을 대도 초음파 신호로 형태를 느끼는 ‘촉각 디스플레이’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20∼30년 뒤에 우리 자손들은 2000년대 초의 구형 HDTV는 손으로 만지는 햅틱기능도 없는 허깨비 영상뿐이었다면서 웃지나 않을까. 이미 온라인에서는 동영상과 햅틱기술의 융합과 관련해서 주목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TV 연속극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자 시청자가 직접 손으로 닦아주는 UCC가 대표적이다. 네티즌은 기발한 동영상을 보면서 대부분 부럽다는 반응이다. 미래 멀티미디어 시장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햅틱정보가 매력적인 촉각 콘텐츠로 부상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미디어와 통신 분야에서는 햅틱 기술이 오히려 복고풍의 감성을 일깨우면서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햅틱기술은 휴대폰, 게임기를 넘어서 여타 산업분야로 확산될 전망이다. 우선 게임, 미디어, 쇼핑, 교육, 의료 분야, 옥외 광고판, 자동차 좌석 등에서 폭넓은 신형 디바이스와 연계해서 소비자를 유혹할 매력적인 햅틱 콘텐츠와 서비스가 잇따라 쏟아질 것이다. 특히 시각 장애인의 활동반경을 넓히는 데 최신 햅틱 디바이스는 매우 요긴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햅틱기술은 불황기에 고객을 유인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구다. 미국의 의류회사는 추운 겨울, 장갑을 낀 채로 터치폰 입력이 쉽지가 않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래서 스타일러스펜을 대신해서 장갑 끝에 좁쌀만 한 금속판을 붙인 다츠 글러브(사진)로 대박을 터뜨렸다. 어떤 완구회사는 아기들이 자궁 안에서 듣던 혈관, 심장 진동을 들려주는 인형으로 큰돈을 벌었다.

 직접 IT기기를 만들지 않는 의류, 완구회사도 간단한 발상의 전환으로 햅틱 트렌드를 이용한 셈이다. 좀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생생한 촉각이 아쉬운 분야가 어디가 있을까. 그동안 햅틱기술의 용도는 밋밋한 디지털 기기의 작동 에러율을 줄이거나 아날로그틱한 재미를 더해주는 보조기구로 쓰였다. 하지만 미래의 햅틱기술은 현대인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촉각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뉴미디어로 진화할 것이다.

 

 ◇촉각은 제4의 커뮤니케이션 언어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에서 물고 빠는 촉각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에서 의사소통의 방법을 처음 배우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음성과 문자, 시각정보에 의존하고 촉각대화의 중요성을 잊게 된다. 요즘 휴대폰 시장에서 일어나는 기술적 변화를 보면 화려한 시각정보에 무덤덤해진 소비자층을 겨냥해서 그간 간과했던 촉각을 자극하려는 추세가 확연하다.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단계로 보면 점잖게 용건만 말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이것저것 함께 보고 수다를 떠는 청소년기로, 온몸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유아기로 다시 퇴행하는 셈이다.

 그 결과 앞으로 통신산업에서는 보고 듣는 것 외에 공감각적 경험의 확산을 통해 새로운 수익모델이 쏟아질 전망이다. 벌써 촉각진동이 차별화된 사용자 환경이 아닌 통신기호로, 삐삐에서 처음 나온 진동신호가 기호화된 통신언어로 진화하는 조짐이 보인다. SK텔레콤이 선보인 Q-메시지는 6가지 진동신호를 결합해서 친구, 가족끼리 통하는 메시징 신호전달이 가능하다. 햅틱전문업체 이머전의 서동희 상무는 “휴대폰 진동신호를 이용한 메시징 서비스가 확산되면 청소년끼리 ‘쿵쿵 따∼’ 비트박스와 같은 통신기호를 주고받는 새로운 언어체계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고 추정한다.

 아프리카 부족민이 평원 너머로 보내던 북소리 신호, 19세기 전신에 사용되던 모스 부호가 21세기 첨단 터치폰 환경에서 다시 부활한 셈이다. 음성, 문자, 영상에 이어서 진동(촉각정보)은 제4의 통신언어로 진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잊고 있던 촉각언어의 세계에 눈을 뜨면 사고방식과 행동에도 적잖은 변화가 일어난다. 지난해 휴대폰 시장에서는 ‘만져라 반응하리라’는 좀 야릇한 광고카피가 인기를 끌었지만 몇 년 뒤에 나올 광고문구는 더 노골적인 버전 ‘만져라 통하리라’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란 호감을 가진 이성에 대해서 만지면→반응하고→서로 통하는 촉각대화의 보편적인 과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최근 휴대폰시장에서 햅틱폰 열풍은 최신 디지털 컨버전스도 결국 인간 본성에 가장 자연스러운 공감각적 커뮤니케이션을 모방하는 복고풍 트렌드임을 증명한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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