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의 맛있는 영화]로맨틱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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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에 만나게 되는 로맨틱한 상상. 떠난 자는 말이 없다.’

 지난 여름에 끝난 MBC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은 무인도(크크섬)에 난파된 홈쇼핑 회사 직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으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무인도라는 무정형 공간에서 벌어지는 낯선 이야기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로 ‘크크 폐인’을 양산했다. 시즌1의 성공으로 현재 후속작이 예고되고 있는 상태다. 사실 크크섬의 비밀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인도’라는 설정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 사상 무인도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물이 드물었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복마전도 특이했기에 시청자는 열광했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로맨틱 아일랜드(강철우 감독, 이선균·이수경·이민기·유진 주연)’는 여러 모로 크크섬의 비밀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렇다. 배경은 무인도는 아니지만 이국적인 섬인 보라카이를 무대로 삼았고 섬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사랑이라는 주제 역시 크크섬과 비슷하다. 크크섬과 로맨틱 아일랜드 둘을 묶어 장르로 표현하자면 ‘아일랜드 로맨스’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크크섬과는 달리 로맨틱 아일랜드에서 네 명 주인공은 보라카이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사이였다는 정도다.

 크크섬이 그랬듯 로맨틱 아일랜드의 시작도 흥미롭다. 마치 피카레스크 구성처럼 액자 안에 액자가 존재한다. 청춘남녀 네 명의 이야기는 섬을 무대로 합리적인 시간을 가지며 영화 곳곳에 뿌려져 있다. 육지의 시간이 멈추는 무정형 공간인 섬의 도움을 크게 받은 셈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의 주제는 ‘보라카이에서 벌어지는 4인의 사랑 이야기’. 그렇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이들이 필리핀, 그것도 보라카이를 방문한 이유가 각각인 탓이다.

 독단적인 회사 운영으로 퇴출 위기에 있는 CEO 재혁(이선균)은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필리핀으로 떠나버린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라카이로 향하고, 소녀 가장이자 생활형 캔디인 수진(이수경)은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한 장소로 필리핀을 선택한다. 또 백수에다 면접 울렁증까지 있는 정환(이민기)은 절친한 친구의 초대로 외국 방문에 나서고 정환과 로맨스가 예정된 슈퍼 스타 가영(유진)은 숨막히는 연예인의 삶이 지겨워 이상향인 보라카이를 방문한다. 필리핀을 방문한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일탈의 섬인 보라카이에서 이들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보라카이는 로맨스를 낳고 로맨스는 또 다른 추억을 만들었다. 고립된 섬에서의 로맨스는 크크섬만큼이나 익숙하게 다가온다. 영화에서는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만고의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백수와 연예인의 사랑도 시작되고 CEO와 사원의 로맨스도 여기서는 모두 자연스럽다.

 이렇듯 두 작품은 많은 곳이 닮아 있지만 간극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명작과 범작을 가르는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섬을 예로 들어보자. 크크섬의 비밀과 로맨틱 아일랜드는 모두 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섬을 이용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크크섬에서는 무인도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추가로 밝혀지고 섬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등 말 그대로 살아 숨쉬는 섬이 매력적이지만 로맨틱 아일랜드에서 보라카이는 단순한 배경에 머문다. 물론 배경이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왜 보라카이인가?’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족한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또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healing) 아일랜드로서의 역할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크크섬과 보라카이 모두 주인공들의 과거 상처를 보듬는 역할을 하지만 크크섬이 플래시 백과 같은 충분한 설정으로 관객을 이해시킨다면 로맨틱 아일랜드는 ‘과거는 잊으라’는 대사 하나로 커플이라는 결론을 향해 무조건 내달린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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