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위기’라는 단어를 듣지 않고는 지나가기 힘든 요즘, 벼랑 끝에 몰린 국내 IT중소기업의 불안감은 더욱 심하다. 글로벌 경제 위기, 환율 급등, IT 경기 위축이라는 갖가지 악재에 휩싸인 IT중소기업에 탈출구는 없는 것일까. ‘정보통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정태명 성균관대 교수)’은 지난달 29일 저녁 서울 삼정호텔에서 ‘IT 중소기업의 내일’을 주제로 10월 정기토론회를 열었다. 김병초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IT 중소기업 경영현황 및 문제점’에 관한 주제발표자로 나섰고, 송혜자 우암 회장이 패널 발표에서 의견을 더했다. 이날 참석한 전문가들은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균형잡힌 지원 정책과 중소기업의 뼈를 깎는 노력이 어우러진다면 짙은 어둠 속에서도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생색내기식 지원 지양해야=참석자들은 최근 같은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면서도 명확한 기준 없이 ‘몰아 주기’ 형태로 지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단순히 잡아놓은 예산을 할당,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변재일 의원(통합민주당)은 “현재 국내 IT를 포함한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너무 어렵다. 시장 논리나 대기업에만 맡겨서는 경제를 이끌기 힘들다”고 위기의 심각성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지만 과거처럼 수요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공급 능력만 확충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부가 시장 수요를 창출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적당하게 맞춰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상철 u-IT클러스터지원센터장도 “과거 IT정책의 실패 사례를 살펴보면 공급자 측면에서 좋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 신기술이 실제로 시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는 간과한 적이 많았다”고 동의했다.
송문숙 이지넷소프트 대표는 “정부가 할 일은 중소기업에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공공기관 IT 프로젝트를 수주하기가 금융 쪽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며 자금지원을 놓고 보면 이른바 ‘눈 먼 돈’은 필요없다”고 지적했다. 또 “무조건 자금만 지원하기보다는 기업이 자생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도와주고, 정말 힘들 때 버틸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석철 유디코스모 대표도 “정부가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 노력 선행돼야=자본주의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만 바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정부가 인프라 붕괴는 막아야 하겠지만 경쟁력이 없는 기업의 미래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한기호 한국방송통신대 방송대학TV감독은 “국내 IT 중소기업이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이를 도입하는 수요자 쪽에서는 불안감이 앞서는 게 현실”이라며 “프로젝트를 수주한 중소기업이 도산하기라도 하면 수요자에게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주환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장은 “대기업과 연계된 단순 하도급업체와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을 구분해야 한다. 남이 없는 기술과 제품을 갖고 있는 곳이 진짜 중소기업”이라며 자사만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김병초 한국외국어대 교수도 “국내 IT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선진국에 비해 뒤처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며 “기술 경쟁력 향상 노력 없이 저가형 제품만으로 승부해서는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에 송혜자 우암 대표는 “중소기업 스스로 단순 용역에 머물지 말고 꾸준한 연구개발(R&D) 투자로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벌이고 해외 진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석구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정책기획단장은 “현실적으로 국내 소프트웨어 및 IT 서비스 기업이 해외로 나가기에는 역량과 경험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은만큼 진출이 가능한 분야를 찾아내 사업 타당성 조사 등을 한 후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설명했다.
◇사라지는 ‘꿈’ 되살려야=참석자들은 글로벌 경제 위기와 IT경기 위축에 못지않게 중소기업의 사기 자체가 꺾이는 것에 더 큰 우려감을 표시했다.
권석철 유디코스모 대표는 “예전에는 보안 기술 분야 젊은 인재들이 벤처신화의 주역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는데 최근에는 구글에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며 “정부마저 IT벤처를 외면하다 보니 많은 이공계 인력들이 공무원이나 외국계 IT기업을 선호하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현진우 바이텍테크놀로지 대표는 우수 인재 영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갈수록 중소기업이 우수 인재를 구하기 힘들어진다. 창업 이후 두 번째 단계는 인력 수급인데 현 상황에서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토론회를 진행한 정태명 성균관대 교수는 “최근의 상황과 관련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기의 중소기업을 구제하는 것과 시장 논리에 맡기는 일 사이에는 큰 폭의 간격이 존재한다”며 “정부가 어떤 기업을 지원하고, 어떻게 공생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 것인지 충분히 고민해 최적의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며 토론을 마무리했다.
<주제발표> 김병초 한국외국어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위기에 놓인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 지원 정책의 효율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책 금융의 효율성은 너무 낮다. 기준 없는 자금 지원으로 시장 기능이 왜곡되고 시장의 적자 생존 원칙을 훼손했다. 예산을 할당해놓고 매출, 수주실적 등 단순한 기준에 따라 나눠주는 식은 곤란하다.
투입된 자금이 제대로 쓰였는지 성과를 평가하는 기반도 취약하다. 정책 자금이 들어간 이후 매출이나 종업원 수 증가한 것 정도로 판단하는데 사실 이들 요소는 얼마든지 늘리려면 늘릴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리적인 기준 없이 자금 지원이 이뤄지다 보니 ‘도덕적 해이’와 ‘역선택’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사라져야 할 기업이 요행으로 존속하고, 경쟁력 갖춘 기업이 필요한 혜택을 못 받기도 한다.
양산되는 혁신형 중기정책도 문제다. 벤처, 이노비즈, 혁신형 중소기업 등에 관한 인증이 줄을 이으면서 3만2000여개 인증기업이 쏟아졌다. 중복된 기업이 7000개를 넘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생색내기식으로 인증제도가 추가되고, 사후 성과 평가도 미흡하다.
창업투자사도 까다로운 투자 기준을 고수하면서 중소기업이 이들에게서 투자받기도 힘들어졌다. 그나마 ‘노예계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투자받는 기업 쪽에서도 부담스러워하는 실정이다.
투자 자체가 줄어든 것도 문제다. 창투사나 엔젤 투자자 모두 매출이 발생하는 기업에만 투자한다. 가능성만 보고 이뤄지는 초기 엔젤 투자는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명확한 기업 신용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평가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국내 중소기업의 인수합병(M&A) 시 제대로 된 가치평가가 이뤄지는 일은 드물다. 코스닥 프리미엄과 보유 자산만 볼 것이 아니라 기업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코스닥 진입·퇴출도 역동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일단 한번 상장하면 좀처럼 퇴출되지 않는 현 구조로는 안 된다. 더불어 적대적 M&A의 제약을 없애 이를 활성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중소기업도 변해야 한다. 소수 기업을 빼고는 기술력이 낮다. 중국에 비해서는 낫지만 선진국보다는 한참 떨어진다. 일본 시장 진출 얘기를 많이 하지만 막상 진출한 기업 상당수는 높은 품질 수준을 맞추지 못해 고생한다. 80% 수준의 성능을 가진 제품을 50% 수준의 가격대로 판매하는 식으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다.
정부가 모든 것에 관여해서는 안 되겠지만 부작용을 막기 위해 필요한 간섭은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부작용이 많을 것이다. 반대로 언제까지 정부가 도와줄 수도 없다. 시장이 알아서 해야 할 것도 분명히 있다. 정부 투자 규모를 유지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패널발표> 송혜자 우암코퍼레이션 대표
제조를 포함해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 모든 IT 중소기업이 시장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중소기업의 고용 창출 효과와 IT를 통한 경제효과를 감안할 때 정부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
중소기업을 넘어 ‘전문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해당 분야에서 전문적인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대기업에는 글로벌화를 지원하고, 중소기업에는 국내 공공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기 바란다. 피라미드 형태의 기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노력도 요구된다. 꾸준한 R&D 투자와 노력 없이 가만히 앉아서 얻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눈앞의 매출만 보고 출혈을 감수하는 무리한 저가경쟁도 지양해야 한다.
해외 시장으로 나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중소기업이 해외 사업을 벌이기에는 마케팅 자금도, 인지도도 부족하다. 이런 부분에서는 정부가 도움을 주면 좋겠다. 우리 정부가 많은 국제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것이 해외 사업발주 정보를 제공해주는 인프라가 마련되기 바란다. 입찰 전에 미리 정보를 구할 수 있다면 국내 중소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프트웨어나 IT 서비스 수출은 무역적자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지방자치단체 수가 우리나라의 10배에 달한다. 분명 틈새시장이 있다. 이러한 부분을 잘 이용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분리발주제도에 관해
이날 토론회에서는 유난히 공공기관 소프트웨어(SW) 분리발주제도에 관한 얘기가 많았다.
10억원 이상 국가 정보화 사업에서 5000만원 이상의 SW를 전체 사업과 분리해 발주하도록 하는 제도지만 강제성이 없어 효용성이 적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정태명 교수는 “분리발주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상당수 정부 기관이 이를 외면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SW 업계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송혜자 대표도 “공공 시장은 직접 제품을 개발하는 중소기업에는 아주 중요한 인프라인데 분리발주제도가 존재는데도 과거와 동일하게 일괄적으로 발주되는 일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에 지석구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정책기획단장은 “분리발주가 강제조항이 아닌 권장조항이다 보니 확산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분리발주를 위해서는 발주기관의 전문성과 경험이 필요한데 아직은 이 부분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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