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CEO]이낙황 디아이디 사장

 작달막한 키에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 인상을 주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1등 상품’을 만들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일본을 넘어서야 비로소 1등이 될 수 있다는 집념에서 나오는 열정이다. 올해로 창업 10년을 맞는 디아이디(DID) 이낙황 사장. 그는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기술전문학교까지 다닌 ‘일본통’이다.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그를 천안에 있는 DID 본사에서 만났을 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달의 절반 이상을 중국과 일본에서 지낸다.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매출 2000억원대의 전문 경영인으로 자수성가하기까지의 이 사장의 인생역정과 경영마인드를 들여다본다.

 

 # ‘인재가 회사의 재산’… 그가 현장에서 사는 이유

 이 사장은 생산 현장의 여사원 속에서 사는 ‘행복한’ 남자다. 사장실이 있기에, 사무실에 눌러앉아 서류 뭉치나 만지작거릴 만도 하지만 그건 그에게 사치다. 틈만 나면 현장으로 달려가 직원들과 대화하고, 가려움이 무엇인지 챙겨준다. 심지어 말단사원의 시시콜콜한 고충까지 모두 듣고, 풀어준다.

 DID 생산인력의 70%가 주부사원인 까닭도 있지만 그의 이 같은 인력관리 방식은 수십년간 생산현장에서 일하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인재가 회사의 재산’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몇 십년을 관리자로 지내다 보니, 사람이 없어 일을 못 하는 때가 종종 발생합니다. 일감은 밀려오는데 일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속 터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깨우쳤죠. 특히 새로운 사람으로 회사를 끌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어디든 던져놔도 헤쳐 나올 수 있는 전문화된 인력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장은 “현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가 통하게 됐다”며 “밤새워 일하자면 따라주고, 또 일감이 없을 땐 기다려주고, 참아주는 상호 간 신뢰가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10년 만에 회사를 20배로 키운 비결 ‘한우물만 파라’

 이 사장은 고집스럽게 ‘백라이트’만을 생산하고 있다. 이 사장이 잘 아는데다 여러 분야로 진출해서는 각각에서 ‘세계 제일’이 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10년 전인 1998년 창업 당시 30명의 인력과 50평 남짓한 아파트형 공장에서 지금은 6300평의 건물에 600명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비결이다. 인력 규모만으로 20배 성장했다.

 “LCD 백라이트 분야에 관한 한 제가 세계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평생 그 분야에서 밥먹고 살았는데,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업의 다각화보다는 백라이트에 근간한 신기술 창출에 ‘올인’하다시피한다. ‘튼튼한 전문기업’을 지향하고 있는 것.

 DID는 이를 기반으로 올해부터 중국 쑤저우에 설립한 동화광전에서 1500명의 직원이 월 80만개의 백라이트를 생산하고 있다. 10개월 만에 정상궤도에 올라 올 연말에는 월 100만개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장은 “모두가 한국의 전문화된 주부인력 때문에 가능했다”며 “이들 50명이 중국 현지로 날아가 6개월씩 생산 지도를 해왔다”고 말했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무엇이든 어느 하나에 미쳐라”

 이 사장은 젊어서부터 새벽별 보고 출근하고, 달 보고 퇴근하는 생활이 습관으로 몸에 뱄다. 오늘이 오기까지 “일에 미쳐 살았다”고 말했다. ‘미친 놈’ 소릴 들을 망정 ‘일에 미치라’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경쟁력의 비결이다.

 그는 일할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경쟁력이다. 지금도 공장에서 지내는 생산직 스타일 그대로다. 현장사원과 함께 망치를 두드리고, 드라이버를 돌리며 함께 호흡하고 있다. 사장과 직원이 함께 망치질하며 진한 동료애를 느끼고 ‘모두가 하나’라는 의식을 쌓아가는 것. 매일 오전 작업에 들어가기 전이나, 회의 시작 전 반드시 ‘우리는 하나다’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도 서로 간 동료애를 갖기 위해서다.

 세 번째 그의 경쟁력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습득한다는 것이다. 몸을 그냥 놔두질 않는다. 일본 첨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어를 마스터하고, 연수로 간 일본에서는 주경야독으로 전문기술학교를 다녔다. 대학 출신도 있었지만 공고를 나와 일본 연수생으로 발탁된 행운을 잡은 것도, 일본 DI와 야마토과학이 기꺼이 투자해 DID를 설립하게 된 것도 모두가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을 주위에서 높이 산 이유다.

 

 # “불경기 대응, 허리띠 졸라맬지언정 인원 감축은 안 한다”

 잘나가던 그에게도 최근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한 실물경기 위축이다. 이로 인해 원자재값이 뛰어 생산단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 당장 미국으로부터의 노트북PC 수출이 줄면서 LCD 백라이트 주문량이 대폭 감소했다.

 불황이 오기 전인 올 초만 해도 토, 일요일 3교대로 일하다 최근엔 조업 및 휴일근무 단축에 들어갔다.

 이 사장은 “어려울수록 서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등불부터 끄라고 지시했다”며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강행한다면, 누가 회사를 믿고 몸을 바쳐 일하겠느냐”고 직원들에 대한 신뢰를 내보였다. 물론 이 사장이 막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조업 단축 등으로 월급이 줄어든 일부 주부사원이 생활비나 자녀 교육비 압박 등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다. 이 사장은 이를 이탈이라고 표현했다.

 “IMF 때 창업해서 지금까지 세 차례 정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탈자를 보면 가슴이 무너집니다. 회사 재산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경기가 회복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이 사장의 신념이 묻어나는 한마디다.

 

 # 가난했던 어린시절 회상하면서 현재의 ‘베푸는 행복’ 깨우쳐

 이 사장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신문을 배달하며 학비를 벌었다. 독학하다시피 공부를 했지만 불행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내 배경이 어렵다 보니 세상에 나와 같이 어렵고 소외된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이 사장이 회사를 만들자마자 봉사동아리 ‘한우리’를 만든 이유다. 초대 ‘한우리’ 회장을 맡아 베푸는 삶을 몸소 실천했다. 매달 소외된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헌신하다 보면 내 직장과 가정을 중요하고 소중히 하는 사고력을 심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다고 이 사장은 설명한다.

 ‘한우리’에는 현재 전체 직원의 10%가 넘는 80명가량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좌우명도 ‘내가 하나 손해보자’다. 상대방이 나로 인해 행복해할 때 나도 행복하다는 것.

 “너무 어렵고 힘들게 살아와, 남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자고 수십번도 더 마음을 다졌습니다. 100명 중 99명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줘도 한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저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그도 가족에게만큼은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하고, 한 달의 반은 해외에서 지내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이 사장은 ‘그저 고마울 뿐’이라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 이낙황 사장은

 1948년 3남 7녀의 아홉 째로 태어났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이사를 다니며 춘천에서 중학교, 서울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아르바이트로 신문 배달을 해야 했다. 1969년도 공군항공통신대를 거쳐 1975년 일본 동화축전기가 한국에 투자한 동화전자공업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릴 적 고생하면서 ‘하면 된다’는 신념과 한 가지 일에 전문가가 되겠다는 요량으로 일본 투자회사에 들어간 것. 이때부터 이 사장은 일본의 첨단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욕심에서 이를 악물고 일본어를 공부한 덕에 입사 3년째되던 해 일본 기술 연수 기회를 갖게 됐다. 이 사장은 이후 일본 삼화전공과 다무라제작소, 어드밴테스트 등을 거치며 기술전문학교까지 졸업하고 전자부품 제조와 반도체 제조장비, LCD 장비제조와 LCD 부품제조(BLU) 등의 분야에서 초지일관 한우물을 파며 오늘의 DID를 일궜다.

천안=박희범기자@hb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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