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내 인도 1위 가전업체로 발돋움하겠다. 10년 후면 비디오콘은 세계적인 거인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한국인 CEO 수출 1호’ 김광로(62) 비디오콘 CEO. 그는 불모의 땅 인도에서 10년 만에 LG전자를 1위 가전업체로 키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7년 LG전자 인도법인장에 부임해 올해 1월 그만둘 때까지 LG전자의 매출을 360억원에서 1조8000억원으로 끌어올렸다. LG전자는 그 사이 컬러TV·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 굵직굵직한 가전 카테고리에서 점유율 1위에 올랐다. 김광로 CEO는 올해 5월 인도 최대 가전업체 비디오콘의 CEO로 전격 영입되며 우리나라와 인도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비디오콘의 베누고팔 두트 회장으로부터 끈질긴 구애를 받았다. 그는 “인도에 미래가 있다”는 말로 운을 뗐다.
-인도에서 20년 가까이 지냈다. 인도는 어떤 나라인가.
▲인도는 거북이다. 경제 성장률이 높아 신흥 강국이라 불리지만 정치 상황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인도는 철저히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다. 인도에는 과거 우리나라처럼 ‘무조건 앞으로’를 외치는 정치인이 없다. 의견을 수렴하고, 서로 조율하는 과정이 길지만 한번 정해지면 다들 수긍하는 풍토가 정착됐다. 지방자치의 수준도 놀랍다.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민주주의 성숙도가 높다. 그런데도 매년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률을 보인다. 전 세계가 인도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중국은 토끼다.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통치 아래 국가가 나선다. 이는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 부작용은 언제 터져나올지 모른다. 우리나라도 그런 문제가 결국 (IMF 등으로) 터지지 않았나. 당장 코앞이 아니라 먼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길게 볼 때 누가 이길 것인지는 자명하다.
-기업을 경영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즐겁다.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의견 조율을 통해 하나의 미션을 만들어 가는 게 훨씬 보람있고 재미있다.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나는 바쁘다는 사람이 가장 이해가 안 된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사람은 여유가 넘쳐야 한다. 리더는 조직원에게 확신을 갖고 미래를 제시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나는 잠도 충분히 잔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하고 신문과 책을 꾸준히 읽는다.
-비디오콘의 미래 경영 방향은 무엇인가.
▲인도 토종 브랜드에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품질·생산성·R&D 기술력 등 내부 역량을 글로벌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 품질 좋은 제품을 통해 인도 시장에서 인지도를 좀더 높인 후 중동,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동유럽 시장까지 확대하면서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나가겠다. 베누고팔 두트 회장은 경영을 부탁하면서 나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인도인들은 자율을 통한 창의와 책임의 힘을 안다. 한국 기업은 리더, 오너의 명령으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여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 기업이 인도 기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인재 확보 계획은.
▲인도는 MBA 출신부터 엔지니어까지, 인재풀이 넓고 수준도 높다. 한국인처럼 행동이 빠르진 않지만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상당히 성실하다. 인도의 잠재력을 이야기할 때 교육열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이 수십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것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의 교육 열기도 이에 못지않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 한국인, 특히 LG전자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을 끌어모아 핵심적인 역할을 맡기지 않겠냐고 하지만 정반대다. 인도의 강한 교육열을 바탕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은 많은 기술자와 MBA 출신 등 현지의 우수한 인재에게 글로벌 비즈니스의 기회를 제공, 인도 사회에도 공헌하고 싶다.
-기술개발은 어떤 식으로 추진하고 있나.
▲선도적 연구보다는 응용기술을 확보하려고 한다. 혁신적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아직 버겁다. 현재 활발히 쓰이는 기술을 잘 응용하고 활용해서 소비자에게 더욱 친숙하고 편리한 제품을 선보일 생각이다.
-글로벌화 추진 방향은.
▲확고한 인도 로컬 시장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겠다. 글로벌 업체라면 내수 시장은 당연히 잡아야 한다. 두고 보라. 수년 내 인도 1위 종합 가전업체로 등극할 것이다. 동시에 그 역량을 세계 시장으로 확대해 나가겠다. 10년 뒤면 글로벌 거인 비디오콘을 보게 될 것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동유럽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 시장에서 생산 및 판매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를 위해 다른 글로벌 기업과 협력도 모색하고 있다. 기술, 마케팅, 생산 등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언제라도 공고한 파트너십을 통해 협력이 가능하다. 한국 기업에도 마찬가지다. 2010년 LCD 패널 생산에 앞서 부품, R&D 등 전방위 협력이 가능하다.
뭄바이(인도)=차윤주기자 chayj@
◆비디오콘은?
비디오콘의 생산 공장 및 사무실 등은 전 세계에 뻗어 있다. 한국에도 디자인 센터가 있다.
비디오콘의 29인치 TV. 현재 비디오콘의 주력 사업은 브라운관 TV다. 2010년 LCD 패널 양산에 나서며, 세계 3대 TV회사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다.
‘설탕 공장에서 인도 최대 가전업체로.’
비디오콘의 시작은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최대의 전자업체인 삼성전자와 비슷하다. 1955년 비디오콘의 창업자 난드랄 두뜨는 유럽에서 기계를 수입해 설탕 공장을 차린다. 사업을 다각화한 회사는 1980년대 초반 일본 도시바와 기술제휴를 맺고 인도 최초로 컬러TV를 생산한다. 그 TV의 이름이 비디오콘(Videocon)이었다.
비디오콘은 인수합병과 OEM 사업으로 성장했다. 도시바와 기술을 제휴해 컬러TV를 생산한 비디오콘은 점차 사업영역을 넓혔다. 컬러TV에 이어 1987년 세탁기 생산에 뛰어들었고, 1989년에는 에어컨, 1991년에는 냉장고까지 생산한다. 1995년에는 소재·부품으로 사업을 확장해 브라운관용 유리, 1998년 냉장고용 응축기 및 모터를 생산하게 된다.
2000년대 들어서 비디오콘은 본격적인 인수합병에 나섰다. 2000년에 필립스인디아의 TV 공장을 인수했고, 2005년에는 세계 최대의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의 인도 공장 3개와 톰슨의 브라운관 사업부를 인수했다. 특히 폴란드·이탈리아·멕시코·중국 등 세계 각지에 브라운관TV 공장을 가진 톰슨을 인수함으로써 비디오콘은 인도 기업에서 다국적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이즈음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 참여를 선언해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이 밖에도 일본의 파이어니어, 모토로라의 휴대폰 사업 인수에도 관심을 표명하는 등 M&A를 통한 사업 확장에 적극적이다.
비디오콘은 1996년 유전 개발에 성공하는 등 에너지 사업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2006년 기준 비디오콘 매출 30억달러, 순이익 1억6500만달러. 이 중 가전사업의 매출이 85% 이상을 차지하지만, 영업이익의 40%를 에너지 부문에서 달성할 정도로 에너지 사업은 캐시카우다.
하지만 비디오콘의 주력 사업은 역시 가전 부문이다. 베누고팔 두트 회장은 2006년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석유사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가전 부문에 투자할 것이며, 이런 자금력이 앞으로 글로벌 기업인 삼성·LG와 경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디오콘의 시장점유율을 살펴보면 인도 시장에서 비디오콘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2006년 비디오콘의 컬러TV는 LG에 이어 2위, 세탁기와 냉장고는 매년 성장세를 보이며 각각 3, 4위에 올랐다. 비디오콘은 최근 오는 2010년부터 LCD 패널 공장을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인도에도 평판TV 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되는 2010년, 자체 패널 수급을 통해 TV 1위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비디오콘의 목표는 전자산업에서 글로벌 리더로 크는 것이다. 비디오콘은 지난해 40억달러 수준의 매출을 2012년 200억달러로 끌어올리고, 세계 3대 TV 제조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비디오콘이 LG전자 인도법인의 성공 주역인 김광로 전 사장을 CEO로 영입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광로 CEO는
‘한국인 CEO 수출 1호’.
김광로 비디오콘 CEO는 1946년 충남 강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 LG그룹에 입사해 주로 미국·독일·두바이·중남미 등에서 해외영업을 했다. 1997년 LG전자 인도법인장을 맡아 불모의 시장이었던 인도에서 LG전자를 1위 가전회사로 올려놓았다. 그 공로로 2005년 LG전자 서남아지역 대표(사장)로 승진했다.
올해 초 LG에서 은퇴했으나 지난 5월 인도 최대 가전업체 비디오콘 CEO로 영입됐다. 베누고팔 두트 비디오콘 회장이 김광로 CEO에게 직접 회장 겸 글로벌가전 영업담당 총괄직을 제안했다.
신문광(狂)을 자처하는 김광로 CEO는 신문, 시사 및 경제잡지 등을 꼼꼼히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신문에 세상 모든 일과 아이디어가 있다는 게 지론이다. 한국발 인도행 직항 비행기를 통해 일간지와 경제지, 주간잡지, 월간잡지 등을 두루 받아본다.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같은 주요 외신도 반드시 챙긴다. 하루 내내 읽어야 할 듯한 분량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항상 느긋해야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게 지론이다.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미국에서 공부 중이다.
차윤주기자 cha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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