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추를 돌려 10년 전 대기업의 한 전자제품 제조라인으로 돌아가보자. TV를 생산하는 컨베이어벨트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생산라인 품질관리(QC) 책임자가 비상벨을 울렸다. 생산되는 제품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제조·구매·설계·연구·품질관리 담당자들이 비상소집됐다. 원인 분석을 하기 위해서다.
일일이 자재리스트(BOM)와 설계도, SMT 장비의 데이터 등을 분석했다. 일주일 이상이 소요돼 찾은 원인은 최종 설계과정에서 수정된 커패시터 용량값 교체가 생산기기에 반영되지 않은 것. 결국, 이미 생산된 2000여대의 TV를 일일이 재작업하고 생산은 일주일 이상 지연됐다. 또 납기 지연에 따른 해외 고객의 클레임으로 수억원의 직접 피해를 봐야 했다.
불과 10년 전에 수시로 발생했던 이러한 문제는 이제 옛날 얘기가 됐다. 제품수명주기(PLM)라는 솔루션이 보급돼 제품 기획부터 설계·제조·생산·단종·폐기에 이르는 모든 데이터가 자동으로 연계되고 관리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업들은 IT 없이는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전사적자원관리(ERP), 공급망관리(SCM) 등은 이제 기업의 공장과 마찬가지로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기업의 경영자는 ERP를 통해 생산현황과 자사의 재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SCM으로 협력업체와의 부품 구매 자동 연계, 전 세계 지사의 재고 사항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됐다.
기업은 직원의 업무 생산성 향상을 위해 경쟁사 동향을 포함한 다양한 경영정보를 제공하고 검색할 수 있게 해준다. 또 직원들 간의 협업을 위해서 그룹웨어 등을 통해 메신저, 영상회의 등을 지원하며 공동 작업할 수 있도록 사이버 공간도 제공한다. 더 나아가 누가 더 효율적으로 ERP와 SCM 등과 같은 IT시스템을 구축하고 활용하는지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삼성전자가 TV 사업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해온 소니를 앞설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SCM이다. 지난 1998년 삼성전자 디스플레이사업부를 맡은 최지성 현 정보통신총괄 사장은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SCM이었다. 반도체 영업을 맡을 당시 SCM 위력을 실감한 최지성 사장은 TV 및 모니터 사업을 총괄하는 디스플레이 사업부를 맡은 후부터 SCM을 추진하기 시작해 TV 업체에서는 가장 앞선 SCM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삼성전자의 SCM 추진성과는 곧 나타났다. 본사 기준 재고회전일수가 지난 1997년 56일에서 2003년 33일로 뚝 떨어졌다. 재고와 채권도 1997년 매출 18조5000억원 중 5조2000억원에 달하던 것이 2003년에는 매출이 43조6000원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재고와 채권은 오히려 3조8000억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SCM을 통해 재고를 축소하고 협력사와 핫라인을 구축했으며 판매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소비자의 기호를 파악했다.
이러한 비용 절감과 소비자 기호 파악에 삼성전자의 마케팅력과 디자인력이 가해지면서 도저히 넘지 못할 벽으로 여겨졌던 소니를 앞지르게 된 자산이 됐다.
델이 PC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가 2위로 떨어진 것도 SCM에서 뒤처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델이 PC분야에서 HP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은 강력한 SCM을 바탕으로 무재고 생산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지만 최근 HP에 1위를 내준 것도 고객 지향, 탄력을 내세운 SCM 2.0을 도입한 HP에 밀렸다고 삼성경제연구원은 분석했다.
포스코의 지식통합관리시스템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포스코의 지식통합관리(KM)를 경험하고 “꿈이 이루어졌어, 꿈이 이루어져!”라고 감탄을 했다. 총직원 1만 7000여명 가운데 35%인 6800명이 매일 이용하며 매일 5만8000여건의 지식이 활용되고 300여건의 새로운 지식이 쌓이는 세계 최고의 지식통합관리시스템이 포스코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포스코의 KM(Knowledge Management)은 글로벌 우량기업이 되기 위한 포스코형 혁신의 핵심 인프라로 지난 2002년부터 본격 운용돼 왔다. 지난해 포스코 KM을 배우기 위해 방문한 기업 수만 190여개사로 전 세계 지식경영의 표본이 되고 있는 셈이다. 장석권 디지털융합연구원장(한양대 교수)은 “일부에서 국내 IT산업이 고용 없는 성장의 주범이라고 비난하지만 뒤집어 보면 고용이 늘지 않으면서도 연간 4∼5%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것은 IT가 기업의 생산성을 높였기 때문”이라며 “이제 IT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것에는 이론이 없다”고 강조했다.
◆ERP로 세계 경영을 하나로 묶는다
IT시스템은 한 번의 투자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경영 이슈에 따라 고도화가 요구되고 규제 등에 따라 새로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외 대표적인 기업들에 발생하는 요구는 글로벌 통합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 구축이다.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국내 대표적인 전자 기업은 1990년대 중반 해외 현지 법인에 ERP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현지 상황에 맞게 구축하다 보니 본사와 각 해외 법인의 재무나 생산 관련된 요소들이 통일되지 않아 사실상 하나의 회사라기보다는 수십, 수백개의 회사가 별도로 활동하는 셈이었다. 또 사업부별로도 다르게 구축돼 별도의 회사처럼 운영돼 왔다. 이러다 보니 본사에서 통일된 정책을 수립하기 힘들었고 재무·생산 등을 효율화하는 데도 점차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법인에 설치된 ERP시스템을 하나의 ERP로 통합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무려 1조원을 투자해 본사를 포함, 해외 120여개 법인의 재무·물류·제조 등의 전산시스템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글로벌 통합 ERP를 구축 중이다. 이 회사는 올 초 본격적으로 구축에 착수, 중국에 가장 먼저 글로벌 통합 ERP를 구축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통합 ERP를 구축해 전 세계 해외 법인의 생산·재고·재무 현황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통합적으로 구매·재고·상품 등을 관리해 효율성을 더욱 높일 계획이다. 또 7일가량 걸리던 해외법인의 연결실적 결산작업이 이틀 이내로 대폭 단축된다. 각 해외법인이 직접 전산시스템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거쳐 본사 전산시스템에 접속해 각종 지원을 받게 돼 전산시스템 운영 효율성도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는 오는 2009년 말까지 이 프로젝트를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LG전자도 지난 2005년부터 한국과 80여개 해외 법인별 ERP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해 올 초 한국·호주에 이어 최근 영국·독일·인도네시아·요르단 법인의 시스템 구축을 완료했다. LG전자의 ERP 통합은 국내와 해외 모든 지역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합쳐 단일 데이터베이스와 동일한 프로세스로 업무를 수행하는 ‘글로벌 싱글 인스턴스(GSI:Global Single Instance)’ 환경으로 구축했다. LG전자는 이를 통해 업무 생산성을 높이고 IT 비용을 절감하며 직원의 업무 역량을 글로벌 수준으로 상향 평준화할 것으로 기대했다.
LG전자 측은 “전 세계 8만여 직원이 지역과 업무 영역에 관계없이 단일 시스템을 이용해 생산·영업·재무 등 각종 경영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기존의 다양한 IT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해 중복 투자를 해소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유럽 등 19개 해외 법인을 대상으로 시스템을 확산할 예정이며 2010년까지 총 1500억원을 투입해 미주·유럽·아시아·CIS·중아 등 전 세계 법인의 시스템 구축을 완료할 예정이다.
두 회사가 일찍 해외에 진출해 각 지역에 우선 ERP를 구축하고 향후에 통합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면 LG화학·금호타이어·삼성물산 등은 아예 초기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글로벌 ERP 구축을 완료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늦게 시작하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는 역설이 통하는 이유다.
유형준기자 hj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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