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이 항상 인류에게 새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기술을 이용해서 오래전 잊고 지냈던 과거의 세상과 접하기도 한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미디어와 통신 분야에서는 최신 기술이 오히려 복고풍의 감성을 일깨우면서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최신 휴대폰 시장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디지털 컨버전스를 통한 ‘퇴행성 첨단기술’의 진화가 잘 드러난다.
◇휴대폰, 잊혀진 촉각을 자극하다.
갓난아기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성인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시각기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탓에 청각과 물고 빠는 촉각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변의 모든 것을 만지고 빠는 학습과정을 통해서 이해한다. 올해 들어 휴대폰 시장의 햅틱(촉각) 열풍을 보면 화려한 시각정보에 무덤덤해진 소비자층을 겨냥해서 그간 간과해왔던 촉각을 자극하려는 추세가 확연하다.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단계로 보면 점잖게 용건만 말하는 어른들의 세계(음성통화)에서 이것저것 함께 보고 수다를 떠는 청소년기(영상통화)로, 온몸으로 세상과 접촉하는 유아기(햅틱)로 다시 퇴행하는 셈이다. 그 결과 삼성전자·LG전자 등 주요 휴대폰 업체들은 신형 터치폰에 진동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속속 추가했다. 삐삐에서 처음 나왔던 진동신호가 마침내 기호화된 통신언어로 진화한 것이다. 이동통신업계는 보고 듣는 것 외에 공감각적 경험의 확산을 통해 새로운 수익모델을 쏟아내고 있다. SK텔레콤이 선보인 Q-메시지는 6가지 진동 신호를 통해서 친구, 가족끼리의 은밀한 대화를 지원한다. 사용자가 진동의 강도와 길이를 편집해 자신만의 진동을 만들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진동을 선택한 배경은 특별한 용건 없이 아는 사람에게 그냥 한번 전화해보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저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도의 의사전달에는 음성통화, 문자메시지보다 좀 더 본능에 충실한 진동신호가 더 효과적이다. 사실 간단한 메시지는 휴대폰에서 느껴지는 진동기호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포켓 속 휴대폰에서 “부∼릉, 붕붕”(언제 집에 와?)이라는 규칙적인 진동이 감지되면 배우자가 귀가를 재촉하는 전화라는 사실을 휴대폰 액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회의시간이나 기타 휴대폰을 받기가 곤란한 상황에서 아주 유용한 통신수단인 셈이다. 19세기 전신에 사용되던 모스 부호가 21세기 휴대폰 환경에서 다시 부활했다. 사람끼리 직접 만나는 의사소통에서 눈짓, 태도 등 비언어적 표현이 차지하는 큰 비중을 생각해보라. 옛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대화했는지 생각을 해보면 디지털 컨버전스의 대열에 촉각 콘텐츠가 포함되는 최신 트렌드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사람은 본래 음성, 문자보다 촉각감성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훨씬 익숙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촉각대화의 중요성을 잊었을 뿐이다. 휴대폰 시장에서 독특한 진동을 이용한 햅틱 기술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음성, 문자, 영상에 이어서 진동은 제4의 통신언어로 진화했다. 올 초 ‘만져라 반응하리라’는 다소 야릇한 뉘앙스의 휴대폰 광고가 인기를 끌었다. 앞으로 나올 휴대폰 광고카피는 “만져라 통하리라”로 진화할 전망이다. 고객들이 잊고 있던 촉각 통신의 세계에 눈을 뜨면 사고방식과 행동에도 변화가 일기 때문이다. 호감을 가진 이성끼리 서로 만지면, 반응하고, 결국 통하는 보편적 수순을 거치게 된다. 앞으로는 청소년들이 ‘쿵쿵 따∼’ 비트박스와 같은 통신기호를 휴대폰 진동으로 주고받는 놀이문화가 생길 것도 같다. 햅틱폰 열풍은 최신 디지털 컨버전스도 결국 인간 본성에 가장 자연스러운 공감각적 커뮤니케이션을 모방하는 과정임을 방증한다.
◇모든 미디어는 서로 통한다.
디지털컨버전스 시대에 모든 미디어는 첨단 IT로 서로 통한다. 자동차는 지난 100년간 탈 것이었지만 IT와 만나면서 새로운 미디어로 진화했다. 이미 자동차 안에는 길찾기를 위한 내비게이션이 설치됐다. 내비게이션이 단순히 도로경로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빠른 길을 찾기 위한 실시간 교통정보를 받고 DMB수신까지 지원한다. 차 안에서 MP3P는 물론이고 고품질의 오락영화를 감상한다. 무선 인터넷 접속을 통한 웹검색, 업무처리도 일상화했다. 사고예방과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해서 자동차 앞뒤에 카메라가 내장돼서 주변 상황을 실시간 영상으로 기록한다. 자동차는 이제 탈 것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 기동성을 갖춘 생활미디어로 변모했다.
지난해 8월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와 폴크스바겐의 마르틴 빈터콘 사장이 전격 만났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마침내 아이팟, 아이폰에 이어서 ‘아이카(i-Car)’를 만든다면서 흥분했다. 실제로 폴크스바겐의 미국 기술 담당자는 “애플과 손잡고 새로운 내비게이션과 휴먼 인터페이스 개발에 힘쓴다”며 “신형 자동차에서 음악은 물론이고 영화까지 내려받아 운전자 기호에 맞춘 엔터테인먼트 환경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밝혀 애플과 제휴를 인정했다.
아이카가 나오면 애플 특유의 디자인 감각과 유저인터페이스를 통해 주행성능보다 통신미디어로서 구매가치를 인정받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가 될 것이다. 사실 요즘 나오는 자동차들은 비슷한 가격대에서 주행성능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고객들은 운전 중에도 접속하기를 원한다. 디지털 컨버전스의 거센 물결에서 자동차 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빌딩도 첨단 미디어로 진화했다. 건물 유리창을 TV 디스플레이로 바꿀 수 있는 투명 디스플레이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KAIST 연구팀은 구하기 쉬운 산화타이타늄 재질의 투명 박막트랜지스터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100인치 이상 크기의 대형 디스플레이도 생산할 수 있다. 더구나 타이타늄은 지구상에 아주 흔하다. 가격경쟁력이 뛰어난 투명 디스플레이의 상용화가 가능하다. 2∼3년 내 상용화될 투명 디스플레이는 가정의 거울 또는 사무실의 유리창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일상에 큰 미디어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요즘 서비스 로봇 분야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분야는 IT와 로봇이 결합한 미디어로봇이다. 로봇이 힘든 육체노동을 대신하는 자동기계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매개체로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미 영어교육시장에서 미디어로봇을 통해서 외국 원어민 교사와 한국 학생을 연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자리를 잡고 있다. 미디어로서 로봇기술의 최대 장점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뿐 아니라 당사자의 인격까지 대변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 새 이동통신과 무선랜의 급격한 보급은 미디어로서 로봇시장의 확산을 더욱 촉진하고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의 물결은 곳곳에서 우리 삶을 바꾼다. 작은 볼펜에도 동영상 캠코더가 들어간다. 휴대폰과 고선명(HD)TV가 결합한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카메라와 노트북PC로 무장한 1인 방송국은 지상파 방송에 못지않은 파급력을 과시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장치로도 미디어에 접속하며 모든 형태의 콘텐츠와 통하는 세상에 산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접하는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새로운 미디어로 변한다. 이제 남은 과제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물결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가 되도록 긍정적인 콘텐츠를 가능한 많이 만드는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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