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30) 전두환과 국보위의 전자산업 진흥책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기업부설연구소의 증가 추이, 2986년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현황

 #1980년대, 산업 정책은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정부는 산업 전반에 걸쳐 개입을 크게 줄이고, 나라 안팎으로 문을 열어 대외 경쟁을 촉진했다. 1970년대 중화학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가 불러온 산업 불균형을 해소하고, 산업과 기업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나아가 정부는 산업구조를 고도화, 첨단산업 활성화하기 위해 기술 및 인력 개발에 투자를 확대하는 등 갖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전두환과 국보위의 전자산업 진흥책. 1980년대 정부는 전두환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로 대변된다. 국보위는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의 강경세력이 합세해 조직한 기관이다. 삼청교육대 실시, 언론 통폐합 등 악명 높은 정책으로 정치·사회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중화학공업 투자 재조정, 과학기술계 정부출연기관 통합 조정 등 국보위는 산업의 기반을 다시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도 담당했다.

 ◇기술 개발이 힘이다=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고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 경제비서실 소속, 정보통신과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비서관실(비서관 오명)도 새로 출범했다. 비서관실은 전자산업 진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정책을 추진했다. 이들은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국장 이동훈)과 함께 당시 전자업계 최대 현안이었던 컬러 TV 방영을 1980년 12월부터 과감히 실현한 데 이어 1981년 1월부터는 장기발전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 시행해나갔다.

 장기 계획의 골격은 반도체·컴퓨터·통신기·전자제품 4개 부문을 중점적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은 단순 조립 생산에서 벗어나 웨이퍼 가공을 통한 LSI급의 생산이 목표였다. 컴퓨터는 소형 이하 기종을 자체 개발한다. 통신기 부문은 전자교환기를 국산화하고, 전자 제품은 부품을 직접 생산해 자동화 및 시설규모의 국제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전자제품 수출을 1981년 22억달러에서 1986년에는 64억달러로 연평균 24%씩 증가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일련의 발전계획을 수립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이다. 김재익 경제수석은 중화학공업 앞세웠던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성을 꾀하며, 전략적으로 육성 가치가 높은 전자산업을 개발해 국가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첨단기술이 집약된 전자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당시 계획은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그만큼 반대도 심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세계의 기술개발 동향은 컴퓨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산업구조 또한 사무자동화와 통신, 무인 자동화 공장, 신소재 개발 등 기술 집약 산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세계적인 기술혁신의 흐름에 편승해 산업을 고부가 가치형, 기술집약형으로 다지기 원했다. 이를 위해 제품·부품·소재 산업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정부출연연구소가 중심에 섰다. 이런 노력은 민간에도 확산돼 정부의 적극적인 기업연구소 육성정책에 따라 기업연구소도 산업 기술 연구의 한 축을 담당했다.

 1980년대 후반 물가·유가·달러의 ‘3저(低) 호황’은 국가 경제의 풍요를 가져왔다. 이는 대외적인 요인이기도 했으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한 기술개발과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려는 노력에 따른 열매였다. 64K D램 개발을 비롯, 반도체 분야의 눈부신 발전과 컴퓨터 개발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은 것도 마찬가지다.

 ◇모으고 다시 분산하라=1970년대 경제 및 산업 발전 전략이 수출 촉진이었다면 1980년대 그 중심은 과학기술 개발 촉진으로 옮겨갔다. 정부는 먼저 국가 연구 개발사업을 효율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정부 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해 과학기술 체제를 개편해 나갔다. 당시 통폐합 전략은 오늘날의 정부출연연구소의 기초가 됐다. 그만큼 혁신적이었다.

 당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19개에 달했다. 5개 부처에 산재해 있던 정부출연연구소는 1980년 과학기술처 산하기관으로 모였다. 출연연구소가 부처별로 경쟁적으로 확산되면서 여러 문제점이 생겼다. 1980년 가을 국보위 경제분과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는 연구기관이 너무 많아 중복 연구 등 투자 효율의 문제가 있고, 예산 및 연구 과제 확보를 위해 지나친 경쟁을 하는 현상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연구개발 효율과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 출연의 이공계 연구기관을 통합·조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과학기술처를 개편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과학기술심의관 10인을 폐지하고, 실장 밑에 종합연구조정관, 기계연구조정관, 전기전자연구조정관 등을 두어 분야별 연구 개발 조정과 기술 현황 분석을 담당하게 했다. 또 연구개발 사업 관리를 위해 연구 관리과를 신설했다.

 정부는 이어 1982년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회의를 직접 챙길 만큼 적극적이었다. 육사출신인 자신을 과학기술자라고 말할 정도로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 발전을 향한 열정은 뜨거웠다. 전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은 미래를 보장하는 핵심열쇠였던 셈이다. 대통령 주재 하에 전 국무위원과 학계, 연구기관 및 산업계 대표가 참석해 기술인력·자금·기술정보·신기술집약화 촉진 등 당시의 기술개발 전략과 정책방향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설정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모두 11회의 회의가 개최됐으며, 이 회의에서 주요한 과학기술정책이 보고돼 시책에 반영됐다.

 1984년에는 기술진흥심의회가 설립됐다. 이 심의회는 주요 산업분야별 기술 수준 및 국내외 기술동향을 분석, 평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 과학기술 인력개발, 투자 촉진, 제도 개선 등 기술혁신에 관한 중요 정책 사항을 협의·조정하는 기능도 맡았다.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박정희 뒤를 이을 과학기술계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박스 기사

 전자업계로 번진 기업부설연구소 설립 붐

 80년대에 접어들며 세계 경제는 장기 불황의 늪에 빠졌다. 국내 경기 또한 중동의 경기 침체, 중화학공업의 과잉 투자 여파로 물가 상승 속 심각한 침체에 놓여 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기업연구소의 설립을 북돋우는 계기가 됐다. 제품의 고급화와 원가 절약을 위해서는 기술혁신이 다급했다. 정부는 정책의 뼈대를 기술혁신에 두고 적극적인 장려책을 추진해 기업의 연구소 설립을 촉진했다. 특히 1981년 개정된 기술개발촉진법은 기업연구소 설립 붐을 일으킨 기폭제 구실을 했다. 바뀐 법에 따라 일정 조건을 갖춘 기업부설연구소는 국가가 시행하는 특정 연구개발사업에 주관 연구기관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일정 인원 이상의 연구원에게 병역 특례제도를 실시하고, 연구 실험 용품에 특별 소비세 면제 및 특례 수입을 실시했다. 연구원이 30명 이상인 연구소에는 건물 및 토지의 지방세를 면제해주는 파격적인 혜택도 돌아갔다.

 1986년에는 연구소 설립 인가 기준을 대폭 낮췄다. 중소기업이 연구소를 설립할 때 자연계 학사 5명 이상이면 족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 부설 연구소도 급증해 1984년 말 중소기업 연구소 비중이 13.2%에 불과했으나, 1986년 말에는 32.1%까지 늘어났다.

 1980년 7개에 불과했던 전자업계 기업부설연구소는 1983년 26개로 세 배 이상 늘었다. 1985년에는 50군데, 1988년에는 191개로 가히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이는 양적 팽창뿐만 아니라 연구소의 내실화, 대형화, 기업그룹 연구소화, 공장지역별 분소화 등 질적인 발전이 함께 이루어졌으며, 중소기업형 연구소, 산학 협동형 연구소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