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50년, 새로운 50년](25)TV경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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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1977년 가전 품목별 시장 점유율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TV 시장에서 격렬하게 맞붙었다. 금성사가 국내 최초의 흑백 TV를 출시하면서 촉발된 이 경쟁은 삼성전자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시장 활성화를 이끄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 TV는 두 회사 모두 기업을 대표하는 주력상품이자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가장 높은 품목이었다.

 ◇두 별의 전쟁=금성사가 먼저 흑백TV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1965년 금성사는 사내에 ‘TV과’를 설치하고 정부에 ‘TV 수상기 국산화 계획 및 전기제품 수출 대책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또 같은 해 9월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기술 도입 계약을 하는 등 국산 TV 생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후 정부가 TV 생산을 위한 외국 부품 수입을 허용하면서 TV 개발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마침내 1966년 8월 1일 금성사는 국내 최초의 TV인 ‘VD-191’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다.

 금성사는 1970년 연 5만2970대 생산 규모에서 1978년에는 118만대로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또 1978년도 연 매출 1700억원에서 TV 매출이 600억원을 차지하는 등 TV 사업에 공을 들였다.

 금성사가 TV 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배력을 보이고 있었던 1969년에야 삼성은 전자사업 허가권을 따냈다. 후발주자로서 금성사를 따라잡기 어려웠던 삼성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분야가 바로 TV였다. 당시 성장 가능성이 가장 컸던데다가 국내 업체들이 TV 생산에 돌입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점도 삼성에는 유리한 여건이었다.

 ◇치고 나오는 삼성=삼성전자는 1969년 오리온전기와 총판계약을 하고 19인치 진공관TV ‘프린스 코로넷’을 위탁 생산해 3270대를 판매했다. 1973년 삼성은 미쓰비시의 기술지원으로 첫 자체 모델인 진공관식 ‘SW-V310’을 개발했고 같은 해 4월 트랜지스터식 19인치형 ‘SW-T506L(마하)’을 발표했다. 금성에 비해 진공관식은 7년, 트랜지스터식은 4년이 늦은 것이었다.

 이 가운데 마하가 큰 인기를 모으면서 삼성은 TV 분야에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삼성이 출하한 TV 모델은 모두 48종이나 됐다. 이 시기만 놓고 보면 오히려 금성을 앞지르는 수준이었다. 삼성전관과 삼성코닝 등 부품계열사를 둔 것은 삼성전자에 큰 힘이었다. 삼성은 1978년 총생산량이 100만대를 돌파, 1위인 금성을 바짝 쫓기 시작했다.

 이때 결정적으로 삼성은 ‘이코노’라는 걸출한 스타를 내놓았다. 이코노는 TV를 켜자마자 화면이 나오는 ‘순간수상’ TV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TV는 스위치를 넣은 뒤 20초 이상 지나야 화면이 나왔지만 이코노는 이를 5초 이내로 단축했다. 1975년 8월 선보인 이코노는 나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에는 전년 대비 500%라는 경이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코노는 1978년 말 내수시장 점유율 40.1%를 기록, 34.2%의 금성을 누르고 마침내 1위를 쟁취했다.

 ◇컬러 TV 개발 경쟁=이런 가운데 1974년 9월 금성사가 미국 RCA와 기술 제휴로 컬러 TV 개발에 나섰다. 1년 뒤인 1975년 8월 삼성전자도 RCA와 기술제휴 계약을 맺고 컬러 TV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금성이 RCA와 특허권 문제로 시간을 끄는 사이, 1976년 6월 삼성전자가 먼저 14인치 컬러TV 시제품 개발을 완료하고 1977년 4월부터 양산에 나섰다.

 금성이 컬러TV의 양산에 돌입한 때는 삼성보다 다섯 달 늦은 1977년 9월이었다. 삼성으로서는 비록 TV 한 분야였지만 창업 8년 만에 18년차의 업계 선두 기업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내수 시장과 수출용 컬러 TV에서 후발 삼성에 따라잡힌 금성은 광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등 만회하기 위한 총력전에 나섰다. 삼성 역시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쏟아냈다. 당시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을 맡았던 김완희 박사는 이 같은 상황을 두고 “두 회사의 광고전쟁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광고비 수입이 늘어난 언론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컬러 TV 방영 시기 논란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대결은 컬러 TV 방영시기를 놓고 또 한 번 벌어졌다. 금성사는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의 컬러 TV 개발 소식에 바짝 긴장했다. 금성사는 삼성이 국내 컬러TV 시장을 선점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무조건 ‘컬러 TV 방영금지’를 외치고 다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흑백 TV도 못 보는 국민이 태반인데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면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로 컬러 TV 방영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승찬 당시 금성사 사장은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박 사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컬러 TV 방영을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삼성은 조속히 컬러 TV 방영을 실시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처럼 컬러 TV 방영 논란이 벌어지고 있던 1975년에 한국전자전람회가 개최됐다. 전람회를 주최한 이춘화 당시 정밀기기센터 이사장은 삼성전자 컬러 TV를 보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컬러TV 방영이 시급하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박승찬 금성사 사장은 아직 이르다며 반대 논리를 폈다.

 양측의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컬러 TV 방영은 아직 이르다. 1981년 이후 방영 여부를 결정하되,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넘어설 때 다시 고려할 수 있다”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삼성전자는 울분을 삼켰고 금성사는 박 대통령 덕분에 컬러 TV 개발 시간을 벌 수 있게 됐다.

 정부는 박 대통령 서거 1년 후인 1980년 11월이 돼서야 비로소 국내 컬러 TV 방영을 허락한다. 내수 시장에서 흑백 TV만을 놓고 경쟁을 펼치던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컬러 TV 시장을 놓고 또다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박승엽·박원규 저. ‘삼성vsLG, 그들의 전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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