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의 과학상식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된다는 방송 광고에까지 유비쿼터스나 나노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언론에 자주 보도되면서 최근에는 ‘슈퍼컴퓨터’도 꽤 보편적인 용어가 됐다.
많은 사람이 안다는 것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다시 말해 그만큼 우리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라는 뜻이다.
슈퍼컴퓨터가 바로 그렇다. 자동차·신약·나노화장품 할 것 없이 슈퍼컴퓨터의 힘을 빌려 개발되는 세상이니 일반인의 귀에까지 슈퍼컴퓨터가 익숙한 것은 당연하다.
슈퍼컴퓨터를 활용하면 같은 연구라도 훨씬 빠르게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는데다 연구개발(R&D)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기존에는 하기 힘들었던 우주탐구, 핵융합 등의 거대 연구 역시 훨씬 수월해진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탐내지 않을 수 없는 장비인 것이다. 문제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데 있다. 제 아무리 부유한 국가나 기관이라 할지라도 수백억원대의 슈퍼컴퓨터를 수요만큼 충분히 구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연구자에게 슈퍼컴퓨터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결핍은 꿈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수도꼭지에서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 물을 쓰듯, 내 연구실에서 슈퍼컴퓨팅 자원을 편하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많은 연구자의 꿈이 돼 왔다.
그런데 최근 연구자들의 이러한 꿈이 현실이 되고 있다. 바로 ‘그리드 슈퍼컴퓨팅’ 덕분이다.
그리드 슈퍼컴퓨팅이란 여러 곳에 있는 이기종의 슈퍼컴퓨팅 자원을 하나의 시스템처럼 묶어서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지난해부터 국내 14개의 슈퍼컴퓨팅 보유기관을 하나로 묶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차세대 초고속 네트워크인 그리드 기술을 이용해 각 기관의 슈퍼컴퓨팅 자원을 사이버 상에서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 있는 천문학자가 3000개의 슈퍼컴퓨팅 노드를 신청하면 대전의 KISTI에서 2000노드, 서울대학교에서 500노드, 부산대학교에서 500노드를 제공하는 식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드 슈퍼컴퓨팅으로 2011년까지 총 60테라플롭스(초당 60조번 연산) 규모의 슈퍼컴퓨팅 자원을 통합 활용하게 되면 슈퍼컴퓨터 구입비용을 연평균 138억원이나 줄일 수 있다고 한다(KISTI 연구결과). 슈퍼컴퓨팅 자원의 활용도가 높아짐과 동시에 연구 성과가 크게 향상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드 슈퍼컴퓨팅의 더욱 큰 의의는 이것이 국가 재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은 쓰나미나 지진 등 갑작스러운 기상재해가 발생했을 때, 슈퍼컴퓨터를 사용해 재해의 추이를 예측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러한 사실은 빙하기를 소재로 한 재난영화 ‘투모로우’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어떤 슈퍼컴퓨팅 기관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대규모의 자원을 비워둘 수는 없다. 그리드 슈퍼컴퓨팅을 이용해 일시에 전국의 슈퍼컴퓨팅 자원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이 반드시 구축돼 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이제 그리드 슈퍼컴퓨팅은 선택이 아닌 국가적인 필수다. 국민 모두 슈퍼컴퓨터라는 단어에만 익숙해질 것이 아니라 슈퍼컴퓨팅의 중요성과 그리드 슈퍼컴퓨팅의 확실한 존재 이유를 깨닫고 미래에 적극 대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 양병태 / btyang@kist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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