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나라의 성장동력은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이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변변한 첨단 공장, 연구개발 센터 하나 없었던 척박한 이 땅에 1960년대 과학자들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오늘의 ‘IT풍요’는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있었다.
초대 KIST 원장을 지낸 고 최형섭 박사는 회고록에서 “미국 존슨 대통령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백악관 과학기술담당 고문 호닉 박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호닉 박사가 공과대학을 만들어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박 대통령이 간곡히 공업기술연구소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KIST 설립은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촉매제가 됐다.
5·16 이후 민족주의 노선을 걷던 박 대통령이 존슨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일종의 정치적 거래였다.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한국은 이에 대한 미국의 대가, 즉 경제원조나 국군의 현대화 등을 요구했다.
정상회담은 냉랭했던 한미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자산업발전에도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 됐다. 1965년 5월 18일 두 정상은 회담 후 백악관 뜰에서 12가지 의제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성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박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 가능성을 한국의 공업계·과학계·교육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검토하기 위해 자신의 과학기술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제의를 환영한다”고 답했다.
이날 성명문에서 KIST에 관한 내용은 대통령 수행원들조차 모르게 마지막 순간에 첨부됐다. 그러나 공동성명의 마지막 구절에 전격적으로 추가된 이 내용은 당시 ‘파월’과 ‘경제원조’ 등 정상회담의 핵심 주제어들에 밀려 언론으로부터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만, 한 신문의 해설기사를 통해 “워싱턴에서 전해오는 그 많은 파격적이니 이례적이니 하는 의전에도 경제원조 분야에선 파격도 이례도 없다. 한 가지 파격이 있다면 존슨 대통령이 먼저 제의한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의 설치 가능성을 검토할 과학고문의 파견뿐이었다”고 평가했다.
가능성에만 머물러 있던 KIST 설립작업은 급속하게 진행됐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꼭 9개월 만인 1966년 2월에 KIST는 간단한 조직이었지만 서울 종로5가, 지금의 기독교방송 부근 한 빌딩의 임시 사무실에서 발족됐다. 이에 앞서 1965년 7월 백악관 측은 대통령 과학기술담당 특별고문 호닉을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조사단은 같은 해 8월, 연구소는 한미 양국의 재정지원으로 설립하며 연구 자율성과 인력 유치에 필요한 예산상 신축성이 보장되는 비영리 독립기관이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 산업계와 유대를 강화해 새로운 산업활동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외국기관의 지원과 장기적 유대가 필요하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호닉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했다.
백악관은 KIST 설립과 관련해 미국 대통령의 임무와 역할을 확정 발표했다. 이 가운데 ‘국제개발처(AID)로 하여금 지정된 공업연구기관’이 KIST 설립을 전후해 한국정부와 과학기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바텔연구소다. 바텔연구소는 미국 정부를 대신한 AID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KIST 설립과 초창기 연구소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바텔의 첫 번째 역할은 ‘KIST 설립 및 조직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1966년 KIST 설립과 지원에 관한 한미 협정서 및 연구소 설립 정관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기초됐다.
KIST 출범 이후 정부와 과학기술계 일각에서는 과학기술진흥시책을 전담하는 각료급 독립부처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과학기술 인력양성이나 국가적 차원의 과학기술 비전을 수립할 수 있는 강력한 과학기술행정기구의 역할이었다.
과학기술처 신설 문제가 대두된 것은 1966년 11월 제10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행정기구의 설립을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67년 경제과학심의회의 김기형 상임위원은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원 설치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기형 상임위원이 제출한 ‘과학기술원 설치방안’을 토대로 최종적으로 명칭이 ‘과학기술처’로 확정됐고, 소속은 총리실로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며 그해 3월 임시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이 개정 공포됐다. 중앙정부 부처로서는 미니급이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최초의 과학기술 전담부처였다.
◆인터뷰-금동화 KIST 원장
기초과학기술의 개발을 주 임무로 하는 국책 종합연구기관. KIST는 국가 미래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창조적 원천기술의 연구개발과 기초·응용 과학의 연구 및 국내외의 연구기관, 학계, 산업계와 협동연구를 수행함을 목적으로 1965년 9월 설립됐다.
차세대 성장동력 육성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과제를 남보다 먼저 발굴하고 해결하기 위해 역량을 모으고 있는 금동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에게 KIST의 어제와 오늘의 역사를 들어봤다.
-1965년 설립 이후 KIST 위상은 어떻게 변했는지
▲정부의 강력한 지원으로 1966년 설립된 KIST는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국가 경제를 일으키는 역할을 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과학입국’을 표방하면서 대통령 연봉을 넘는 파격적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KIST는 설립 2년 만에 분야별 핵심 과학자 35명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의 ‘싱크탱크’였던 KIST는 국가 산업의 정책수립에서부터 연구개발 활동, 산업계 기술지원까지 철강·기계·조선·화학·전자·자동차 공업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21세기를 맞아 KIST는 패러다임을 세계화로 전환하고 기초·원천 기술과 에너지, 자원, 환경, 국방안전 등 위험부담과 동시에 공공성이 높은 ‘국가가 꼭 해야 하는 과제(national agenda)’에 역량을 집중해 사회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연구분야가 얼마나 늘어났는가.
▲60∼70년대에 KIST는 외국기술의 국산화로 산업화의 주춧돌을 놓아 현재 우리나라 주요 산업의 원동력을 창출했으며, 80∼90년대에는 당시 첨단산업의 핵심기술 개발에 주력해 과학기술 경쟁력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기여했다.
기초원천기술과 융합기술에 대한 투자 필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KIST는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서 기업이나 대학 연구소와 긴밀히 협력해 융합기술 원천연구의 선도적 모델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1981년 KIST는 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 1971년 설립)과 통합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되며 연구소 출범 15년 만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1980년 당시 신정부가 국정운영의 효율성과 능률성을 강조하면서 단행된 경제사회적인 통폐합 조치는 정부출연연구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산업체에 적용할 잣대를 그대로 적용해 연구개발의 생산성 측면이 고려되지 못했다. 연구기능과 학사기능의 진정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1989년 6월 KIST와 KAIST가 다시 분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앞으로 운영방침은.
▲KIST는 뇌과학과 연료전지 분야 등을 중심으로 연구자원을 집중 지원하기 위해 연구센터를 육성하고 있다. 즉, 잘하는 연구그룹을 집중지원해 세계적 표준 모델을 만들고 후발 그룹들이 따라오도록 하는 전략이다.
KIST의 또 다른 전략은 인재확충이다. 뛰어난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아울러 외부인력을 활용하는 ‘오픈 랩’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 오픈 랩은 KIST의 연구 인프라를 탐내는 대학교수 등 외부 인력에 연구연가나 방학기간 동안 연구실, 연구비, 숙소 등을 지원해 주고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다.
김동석기자 d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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