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새 정부가 출범했다.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면서 창조적 실용주의로 경제를 살리고 선진화를 이룩하겠다는 새 정부의 국정목표는 지극히 적절하고 타당하다. 우리 모두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과 분열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설득과 양보를 통해 사회통합을 달성하려는 새 정부의 진지한 노력에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도 예외일 수가 없다. 특히 과학기술은 선진화를 위한 우리 노력의 핵심이 될 분야다. 과학기술을 외면한 선진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창조적 기술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국가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명백한 역사적 진실이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선진화도 과학기술계의 선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 일을 해야 할 과학기술계가 난처한 처지에 빠져 버렸다. 산업화를 이룩한 주역으로서의 경험을 살려서 선진화를 위한 노력의 선봉에 서겠다는 과학기술계의 꿈이 인수위를 주도한 소수의 왜곡된 현실 인식 앞에서 산산이 깨져 버렸다. 40년 동안 애써 만들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이라고 평가받은 우리의 독특한 과학기술 행정체제가 힘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정치 논리에 휩쓸린 야당도 과학기술 행정체제의 후퇴를 손놓고 지켜보았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심각하다. 우선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낭비를 줄이고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우리의 과학기술 예산 규모에서 15개 부처·청의 독립적인 연구개발 사업 수행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종합 기획·조정 기능이 꼭 필요하다.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전문적 평가와 장기적 안목을 바탕으로 하는 예산 배분권의 확보도 중요하다.
출연연의 기능을 재정립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과 노력도 필요하다. 이제 13개의 출연연을 떠맡게 된 지식경제부까지 기초·원천기술 개발에 뛰어들게 되면 중복 투자에 의한 낭비의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조직의 슬림화를 위해 기능적 통합을 추구하겠다는 인수위의 당초 목표는 실종된 것이다.
교육 현안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과학기술 행정을 살려내는 일도 중요하다. 일본의 문부과학성 장관도 업무의 90%가 교육이라고 한다. 우리의 사정은 훨씬 더 어렵다. 법학대학원, 영어교육, 교육과정 개편, 초중등 교육의 지방자치, 대학 운영 자율화 중에 만만한 과제는 하나도 없다. 교육 분야의 행정 수요 감축이 선행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무리한 통합이 자칫하면 교육 현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과학기술 행정은 통째로 실종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물론 과학기술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은 아니다. 이제 과학기술계가 국가 지도자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안주해왔던 그동안의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더 이상 지도자의 의지만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연구개발에만 전념하는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연구개발의 성과를 경제적 잣대로만 평가하겠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연구개발을 통한 유능한 산업인력의 양성이나 과학적 합리주의 확산에 의한 사회·문화적 성과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과학기술계의 성과를 인정해달라는 수동적 자세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세상이다.
이제 과학기술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없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조직화도 필요하고 적극적인 사회·정치 참여도 외면할 수 없다. 정치권도 과학기술계의 그런 노력을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과학기술행정체제를 훼손시켜버린 책임을 져야만 한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이번 총선에 출마하는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공천하고 지원해야 한다. 전문가를 활용하기 위해서 마련된 비례대표의 취지도 충분히 살려내야 한다.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자의 정계 진출이 우리 정치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duckhwan@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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