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기업]이주용 KCC정보통신 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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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왓슨 회장, 사원번호 955812입니다. 대만과 필리핀에도 IBM 지점이 있는데, 왜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는 것입니까? 더 늦으면 좋은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그러나 말단 사원에 불과했던 젊은 이주용이 62년 IBM을 이끌던 토머스 J 왓슨 회장에게 ‘무모한’ 편지 한 통을 보낸다. 불운했던 나라 모습이 이주용을 IBM 한국인 1호 입사자에서 한국의 컴퓨터 도입 중요성을 역설한 열혈 청년으로 변신시켰다.

 “7년 미국 생활 끝에 찾은 조국은 실망스럽게도 ‘한국 사람은 안돼’라는 진한 패배의식과 벌거숭이 민둥산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컴퓨터를 아는 사람이 전무해 정보기술(IT)을 이해해주는 사람만 만나도 눈물이 났었소.”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72)은 자신의 인생을 ‘컴퓨터와 함께 한 50년’이라고 했다. 그가 최근 완성한 회고록 제목도 ‘반세기 컴퓨터와 함께 한 나의 인생(전자신문사 펴냄)’이다.

 컴퓨터 불모지, 국민소득 80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에서 시작한 그의 컴퓨터 인생은 격동의 한반도 50년사와 그대로 ‘오버랩’된다. 이 땅에 컴퓨터를 소개하기 위해 정치인·군인·미군 참모·정보요원·기업인·주미대사 등 얼마나 많은 현대사 인물을 만났던가. 회고하는 그의 입에 박정희를 비롯한 김종필·김용태·김유택·유창순·김복희(정가의 유명 요리점 대표) 등이 오르내렸다. 경제개발 5개년을 서두르던 당시 군사정부는 “서비스 사업은 ‘룸살롱’ 같은 거 아니요? 우리는 제조업과 같은 경제를 일으킬 산업이 필요하다”고 다그쳤고, 미국 대사관은 “한국과 같이 부패한 나라에서 컴퓨터 사업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래도 컴퓨터 도입에서 60년대 군사정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보수적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군 기관, 몇몇 공무원들은 경제에 도움된다면 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한국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무지할 때는 서러울 정도로 무신경하지만, 한번 불 붙으면 신바람이 나서 나라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기질을 지녔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30대 초 삼성 임원을 상대로 컴퓨터 강의를 하는 데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나타난 게 아니오. 이 회장은 원래 선생을 불러놓고 독대하는 스타일이지, 임원들과 동석해 강의를 듣지는 않는다 말이오. 컴퓨터에 대한 이 회장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었지요.”

 그 관심이 오늘날 ‘반도체 삼성’을 일으키는 초석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젊고 빠른 것만이 최고’로 대접받는 정보기술(IT) 분야에 후배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조언해주는 원로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컴퓨터 분야에선 이 회장이 그런 사람이다.

 이 회장은 다시 ‘30대 주용’으로 돌아간 듯 산업계 풍토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쏟아냈다.

 “왜 소프트웨어에 투자하지 않는 거요? 정부와 교수들한테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 (60∼70년대에는)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을 몰라봐 주더라고. 프랑스 ‘불(Bull)’ 영국 ‘ICL’ 등 하드웨어 업체들이 IBM 아성에 도전한다고 호기를 부렸지만, 다 별 볼일 없게 됐잖소. 그런데 이용태(삼보컴퓨터 설립자)도, 교수들도 하드웨어에만 매달리더라고. ‘타이컴(중대형 국산 컴퓨터 기종)’도 하드웨어 개발에 너무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닐까 싶어. 소프트웨어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봉이 김선달’이 되기 십상이었지. IBM은 70년대부터 소프트웨어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어요.”

 특히, 그는 교수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오직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 프로젝트를 제안한다든지, 또 체면 때문에 1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지 않는 등 반성하지 않는 풍토가 큰 문제라는 것이다.

 “인도를 보시오. 우리보다 10년 늦게 출발했지만, 소프트웨어 대국이 되지 않았소. 소프트웨어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 회장은 또 창의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아쉬움을 진하게 내뱉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것에 대해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창조적인 머리는 미국을 아직 못 따라가고 있어요.”

 “미국 친구가 사람 목소리를 알아듣는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음파를 이용해 단순하게 구현하는 방법을 찾아내더라고.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 창조적인 것은 단순함에서 오는 것인지도 몰라요.”

 이 회장은 수십 년 전 상황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컴퓨터에 대한 열정 덕분인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겨 기억한 것 같았다. 회고록에도 혈기왕성하고 ‘바른 말’하는 젊은 주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마저도 큰아들이 뺄 것 빼고 마지막에 손을 많이 본 것이라고 그는 껄껄 웃는다.

 “삼성 강의를 끝내고 이병철 회장과 함께한 점심 자리에서 ‘오늘은 내가 당신의 선생이요’하고 맞담배를 폈거든.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었지. 그런데 나중에 맹희(이병철의 장남)가 젊은 놈이 버릇없다고 아버님이 단단히 화났다고 귀띔해주더라.”

 그는 “아주 가끔씩은 ‘내가 좀 더 순했더라면…사람들을 더 잘 설득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종종 해봐요”라고 했지만, 그 말은 사리사욕을 위해 계산된 행동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는 말로 들렸다.

 울산 만석꾼 아들로 태어난 이주용 회장이다. ‘실패도 있었고 사서 한 고생은 더 많았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스치는 순간, 그의 회고록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이 회장은 “열심히 살고 또 운이 있다면, 부는 따라 오는 법”이라면서 “돈 벌려고 뭘 해본 기억은 별로 없다”고 덧붙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수성’은 그 무엇보다 어렵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말씀입니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 사진= 윤성혁기자@전자신문, shyoon@etnews.co.kr

 

 ▲이주용 회장은?

 한국 컴퓨터 산업의 산파 역할을 했다. 35년 경남 울산 출생으로 서울대 재학 도중인 55년 미국 유학(미시건대 경제학부)을 떠나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 컴퓨터 오퍼레이터, 보건대학원 전산실무 책임자로 일한 것이 계기가 돼 컴퓨터와 평생 인연을 맺었다. IBM 입사 1호 한국인으로 코볼 개발 등에 두루 참여했다.

 62년 당시 IBM 회장인 토마스 J 왓슨 주니어에게 직접 한국 진출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67년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 소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대한민국 1호 컴퓨터 ‘파콤222(인천항 도착 기준, 통관일자 기준으로는 IBM1401)’를 들여왔다. 전자계산소는 이후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KCC)로 탈바꿈했고 KCC정보통신의 모체가 됐다.

 KCC정보통신은 대기업 그룹의 자회사가 아닌, 독립적인 시스템통합(SI) 업체로 성장한 거의 유일한 기업으로 금융·기업·주민등록 전산화 등 국내 정보화 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이 회장은 현재 KCC정보통신·시스원·KCC모터스·종하E&C 대표이사 및 회장, 종하장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큰아들인 이상현 KCC정보통신 사장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내성적이시다. 사업을 어떻게 해오셨을가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은행에 대출해 사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고 정말 정보기술(IT)이라는 한 우물만 파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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