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IMF)의 망령이 아직도 구천을 떠돈다. 벌써 세월은 10년이 다 돼간다. 고이 잠들기를 바라도 제(祭)를 잘못 올린 탓인지, IMF 망령은 쉬 잠들지 못하고 있다.
망령을 대표하는 현상은 청년실업, 중산층 몰락, 기업 헐값 매각이다. 청년실업은 고질적인 사회병으로, 바뀌는 정권마다 최대의 숙제다. 중산층의 회복은 부동산 가격 급등에 눌려 회복 기미가 안 보인다. 쓴잔을 마시는 데 이력이 난 기업 헐값 매각은 무감각증에 걸려 있다. 끈질긴 IMF 망령의 분자(分子)는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다.
대우일렉의 매각 협상이 지난해에서 올해로 넘겨졌다. 매입 주체인 비디오콘 컨소시엄의 도를 넘어선 ‘마구잡이식 깎아 내리기’ 때문이다. 팔려고 마음 먹었으면 대부분 웬만한 가격이면 거래가 이루어진다. 다소 손해보는 듯해도 일단 안정화를 위해 매각에 힘쓴다. 일반적인 상거래가 그렇다. 하지만 비디오콘의 제시 가격은 터무니없어도 너무 터무니가 없다. 시쳇말로 ‘털도 안 뜯고 먹겠다 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우일렉과 비디오콘 양측이 합의한 7000억원에서 비디오콘 측이 제시한 가격은 13%를 깎은 6000억원 수준. 대우일렉의 2005년 매출은 2조1000억원이다. 매출의 30%도 안 되는 가격이다. 대우일렉이 현재 보유한 자산 규모만 5600억원이다. 가격 조정폭과 우발채무로 인한 조정폭을 감안해도 있을 수 없는 헐값 매각이다. ‘매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최대한 싸게 사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거래에서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도를 넘어서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더욱이 국민이 지켜보는 기업이라면 지나친 에누리는 ‘국민 정서법’에 위배된다.
돌이켜보면 기업 헐값 매각에 대한 아픈 기억은 바로 엊그제 일이다. 2002년 하이닉스반도체 LCD 사업부문인 하이디스는 중국 비오이그룹에 단돈 1500억원에 매각됐다. 높은 기술력을 갖고도 하이닉스의 당시 구도상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비오이그룹은 계열사 지분투자로 매각금액을 모두 회수한 채 신규투자는 하지 않고 기술만 뽑아갔다. 부채비율은 2003년 154%에서 지난해 2만2672%까지 늘어났다. 결국 지난 9월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예견된 상황이었지만 기업 매각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다. 하이디스는 매각 당시 헐값 매각이라는 말이 많았다. 기술유출 우려도 있었다. 결국 우려가 현실로 되돌아오면서 기업 매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필요한 부분만 빼먹고, 껍데기는 버리는 것이 글로벌 기업 사냥의 냉엄한 현실임을 깊게 깨우쳤다. 잘못된 기업 매각은 결국 국부 유출이다.
대우일렉 역시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대우일렉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경영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우선이다. 조급한 것은 대우일렉 당사자고 채권단이다. 깔끔하게 정리하고픈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전 조율과 기술유출 방지, 사업의 영속성과 국민정서 부합 등이 바탕이 돼야 한다. IMF 당시처럼 ‘조급증’이 먼저 작용한다면 한국은 ‘기업 땡처리’ 시장이 된다. 앞으로 그 후유증은 감당하기 힘들다.
더욱 큰 문제는 하이디스에 이어 대우일렉의 매각이 ‘싸구려 한국기업’으로 낙인찍히는 일이다. 차후에 거론되는 한국기업의 매각 건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제값주고 사더라도 속는 기분마저 든다. 과도한 ‘에누리’가 주는 부작용이다. 변화무쌍한 IT환경에서 기업은 언제든지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다. 한번 ‘싸구려’로 낙인찍힌다면 누가 제가격 들고 기업을 사려고 나서겠는가. 이번 대우일렉의 매각건이 주는 메시지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이경우 팀장@전자신문, k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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