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전체를 관통하는 균형감 아쉬움…연기파 배우들의 열연 돋보여     멜로 영화는 세계의 다양한 모습을 남녀의 연애관계 속으로 집약시킨다. 멜로 영화 속에는 단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혹은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 갈등이나 장애 요소로 등장하는 것들을 통해, 사회 내부의 역학관계와 욕망의 지형도를 통찰하게 하는 기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멜로 영화들은 이상하게도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있다.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지나치게 신파조로 흐르거나 아니면 현실과 단절된, 뿌리 뽑힌, 비현실적 서사로 넘쳐난다. 왜 사랑은 현실적 고통과 무관한 것일까? 사랑이야기가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일상적 리얼리, 즉 현실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할 때 이야기 하는 것들’은 보기 드물게 일상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멜로 영화다.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것도, 그들의 사랑이 갈등을 겪는 것도 모두 현실의 참혹함 때문이다. 인구(한석규 분)는 우리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동네 약국의 약사다. 넓지 않은 공간에는 천정까지 빼곡하게 온갖 약들이 진열되어 있고, 숙취음료나 강장제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약들을 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은 슈퍼 드나들듯이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중 한 사람이 여주인공 혜란(김지수 분)이다.     두 남녀의 만남에 새로운 것은 없다. 술취한 혜란이 집에 들어가기 전 약국에 들러서 숙취음료를 산다. 동네 약사와 주민의 관계가 조금씩 특별해지는 것은, 그들의 사적인 삶의 아픔이 드러나면서부터이다. 인구에게는 요양원에서 나온 정신지체장애자인 형 인섭(이한위 분)이 있다. 늙은 어머니, 그리고 정신지체장애자인 형과 함께 사는 인구는 결혼을 아직 못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인구의 형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여자 집안에서 반대한 것이다.     혜란은 동대문에서 일하는 의상 디자이너다. 세계적 명품 의상들을 보고 똑같이 베끼는 이른바 짝퉁 디자이너다. 그녀 역시 혼기가 지났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사는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빚 5억원의 이자를 갚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만나는 남자가 있지만 변호사인 그는 유부남이다. 결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유부남이 편한 것이다.     자, 이렇게 각각 상처를 지닌 남녀가 만나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절제와 여백의 울림이 없다. 자질구레한 일상의 디테일한 묘사는 있지만 그것들이 구체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서사가 씨줄 날줄로 조직되며 파괴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 부분이 미약하다.     배우들은 제 몫을 하고 있다. 한석규는 최근 들어서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김지수는 ‘여자, 정혜’의 섬세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장애인으로 출연한 이한위는 넘치지 않고 모자라지 않는다. 문제는 이들 연기의 조합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이 너무 좁다. 각 캐릭터들의 구체적 성격묘사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그들이 긴 울림을 줄 수 있게 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의 부족이 배우들의 연기에 파워를 실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낭만적으로 포장하거나 현실과 유리된 거짓 현실을 만들어 놓고 인위적 사랑 이야기를 풀어 놓는 제스처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은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그리고 더 좋은 멜로 영화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거시적 힘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의 두 주인공들이 똑같이 아버지 부재인 상태라는 것은, 현재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한국적 현실의 또 다른 상징이다. 주인 없이 표류하는 망망대해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은 서로 좋아한다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한 사람은 가족의 장애 때문에 또 한 사돈 때문에 각각 사랑을 이루는 데 현실적 고통을 느낀다.     ‘사랑할 때 이야기 하는 것들’이 갖고 있는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균형감각의 상실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후반부에 서사는 급격히 안정감을 잃고 기우뚱거린다. 갈등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의 극복방법에 대해서는 상투적 수순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상상력이다. 이 영화는 상상력에서 밀렸다. 뒷심 부족이 영화의 긴 감동과 여운을 만들지 못한 근본적 이유다.      <영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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