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ETRI의 르네상스를 기대한다

 최문기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 교수가 IT분야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새로운 사령탑을 맡았다. 이번 ETRI 원장 공모에는 현 임주환 원장을 포함해 총 7명의 과학기술계 인사가 도전장을 내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IT업계는 차기 ETRI 원장에 누가 선임될지 숨죽이며 이 과정을 주시해왔다. ETRI라는 국책연구기관의 수장이 IT업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IT업계는 최 신임 원장 체제의 ETRI가 국내 연구개발(R&D) 조직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고 IT의 산실이라는 명성에 부합하는 위상을 다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ETRI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의외로 차갑다. 정체성의 위기라는 소리도 들린다. 특히 과학기술계에서 ETRI가 갖고 있던 기술적인 리더십이나 자긍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은 통렬하다. 드러내놓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전전자 교환기(TDX)나 CDMA 시스템 개발 이후 ETRI가 내놓은 업적 가운데 내세울 만한 게 무엇이 있느냐는 비판이다. 와이브로나 DMB기술이 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 제품 개발과정에서 ETRI가 전성기에 버금가는 기술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아직 시장의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진단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공공 연구기관을 평가하는 잣대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연구 생산성’이다. 지난 5년간 ETRI의 기술료 수익은 적게는 연간 76억원에서 많게는 156억원에 이르렀다. 기술료 수입만 보면 다른 출연연구기관보다 우위에 있다. 하지만 투자대비 수익률은 6.24%에 불과하다. 연구비 100원을 투자해서 기술료로 6원을 벌어들인 셈이다. 상품화 실적을 보면 더 심각하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1697건의 기술을 이전했으나 상품화에 성공한 것은 고작 27건이다. 상당수 기술이 휴면기술로 전락했다는 우려감을 지울 수 없다.

 물론 ETRI 입장에서는 R&D 환경이 바뀌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흔히 표적이 되는 게 정부의 PBS제도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기관 또는 팀별로 경쟁을 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장기 기술개발전략을 수립해 핵심 원천기술 확보에 나서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프로젝트 수주에 실패하면 인건비 건지기도 힘든 구조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데 원천기술의 개발자가 되고 기술 전파자가 되라고 강권하는 게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무리일 수 있다. 연구원들의 사기도 예전보다 많이 떨어졌다. 이렇게 가다가는 ETRI가 국가 연구개발프로젝트만 수주하고 원천기술은 외부 기관이나 기업에 아웃소싱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신임 최 원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원천기술 개발이나 유무선 및 통신·방송 융합 시대에 걸맞은 미래예측 능력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며 “핵심연구 역량의 고도화와 전문화를 통해 ETRI에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R&D에 원가 개념을 도입하고 연구비 투입 대비 성과 창출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R&D 체제 완성이 가능하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기대가 크다.

 최근 정부가 중앙 행정부처·산하기관·공공연구기관 등을 대상으로 기관의 혁신수준을 평가한 결과 ETRI와 같은 공공연구기관들의 혁신 역량이나 수준이 가장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일반 행정기관과 연구기관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의 실타래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그만큼 신임 원장의 갈 길은 아주 멀다.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