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열린 한 IT 관련 전시회에는 ‘IT강국’ 한국의 위상에 맞는 첨단 제품이 대거 등장, 국내외 바이어 5600여명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직접 행사장을 방문한 일반 관람객이 20만명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주최 측 역시 관람객을 위한 서비스를 대폭 강화했을 뿐 아니라, 참가 기업들도 고객 편의성을 증대시킨 제품들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주력했다.
이는 이제 고객이 단순한 제품 구매자가 아닌 ‘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IT 인프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터넷을 필두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고객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다양한 관심과 의견을 표현하고 있다. 제품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 트렌드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기업들 역시 ‘다양한 고객의 목소리’에 대한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고객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 경쟁력 강화에 최우선 과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기업들은 고객만족이 경영 전략 수립의 최우선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그러나 불황의 여파와 지나친 경쟁 탓인지 기업들은 구조 개선을 위한 프로세스 향상과 이를 통한 원가 절감 달성, 수익성 향상에 급급했던 게 사실이다. 이처럼 시장의 요구나 고객의 필요보다는 자사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기술 도입을 추진하고 혁신을 주도함에 따라 고객들은 자신들의 요구와는 별개로 늘 ‘기업이 제시한 비전’을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업이 튼튼한 구조를 갖추지 못한다면 고객을 만족시킬 만한 제품 생산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기업이 단순히 자사의 체질 개선에만 치중한다면 과연 얼마나 고객의 요구를 제품과 전략에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스팬션은 세계적인 휴대폰 제조사를 주요 고객사로 상대하며, 이들이 원하는 시점에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고 단기간에 출시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혁신적인 플래시메모리 솔루션 개발에 주력함으로써 업계 선두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 스팬션은 고객을 위한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고 최종고객-휴대폰 사용자의 최신 요구사항을 수렴하기 위해 휴대폰용 플래시메모리의 데이터 용량을 증대시키는 데 R&D 인력 및 자본을 집중했다. 그 결과 낸드의 장점을 차용한 ‘오어낸드’ 와 플래시메모리의 집적도를 대폭 향상시킨 새로운 기술인 ‘미러비트 쿼드’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기업은 기술 주도형 혁신이 아닌 ‘고객 중심의 기술 개발’을 펼쳐나가야 한다. 제품을 1차적으로 사용할 고객뿐 아니라 고객의 고객, 즉 최종 소비자를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공급하는 혁신에 앞서 개발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고객 처지에서 판단하고 더 많은 고객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더욱 큰 부가가치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고객 중심 혁신은 단순히 제품 기술 개발 분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품 공급과 동시에 완벽한 서비스 및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최근 운영 효율성 논란이 일고 있는 외국계 기업들의 국내 R&D 센터 역시 이러한 ‘병행 서비스 및 고객 지원’ 측면에서 더 많은 고민이 이뤄진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내 IT업체들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가진 한국 소비자들이 큰 역할을 했음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이러한 고객 중심 혁신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이 ‘고객이 단순한 제품 구매자의 자격이 아닌 기업의 기술력에 높은 관심을 갖는 후원자’라는 사고의 전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권성태 스팬션코리아 사장 steve.kwon@spans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