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스포럼]통신·방송융합과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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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지상파방송 3사 간에 중계권 논란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다. 한 방송사가 올림픽을 비롯해 월드컵 중계권까지 확보한 데서 문제가 불거졌는데, 그 과정을 두고 설왕설래 논쟁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중계권 관련 분쟁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중계권이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한 것은 1990년대 후반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승승장구할 때부터였다. 물론 그 전에도 중계권이 있었지만 방송사 간 갈등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박찬호 이후에는 박세리가 등장하며 LPGA와 PGA 중계권이 고개를 들었고, 올해에는 WBC야구대회와 독일월드컵 중계권이 입방아에 올랐다.

 이처럼 중계권이 사회적 논란이 되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매번 비슷한 갈등이 재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계’라는 단어 자리에 ‘콘텐츠’라는 용어를 끼워 넣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중계라는 단어 자체는 방송, 즉 공공성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은 이미 콘텐츠 비즈니스 단계로 넘어가 있다. 중계의 당위성과 콘텐츠의 수익성 사이에 충돌이 생긴 것이다.

 국내에서는 “과당경쟁으로 중계료만 올렸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시청자가 부담해야 한다” “중계료를 충당하기 위해 무리한 광고 집행을 하게 된다”는 등의 논란이 많지만 콘텐츠를 중심으로 격동하는 세계 시장의 흐름에서 보면 이들은 대부분 소모적인 논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국내에서 합의한다고 해서 세계 시장의 트렌드가 바뀔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디지털 환경이 확산되면서 콘텐츠를 둘러싼 경쟁은 날로 격화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컨버전스의 진행과 함께 DMB·와이브로·IPTV 등의 새로운 콘텐츠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통신과 방송의 융합이 최대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지난달 28일 국무총리 직속으로 통·방융합의 법제도적 정비를 위한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이 기구가 만들어진 목적 중 하나는 내년 상반기에 통·방으로 분리돼 있던 규제기구를 통합규제기구로 개편한다는 것이다. 개편의 핵심은 통·방의 기계적인 통합이 아니라 콘텐츠를 중심에 둔 ‘시스템 재편’이다.

 혹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3기 방송위원 임명식에서 “산업적 측면에서 발전에 지장이 없도록 정리해 달라”고 언급한 것을 두고 방송보다는 통신 쪽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콘텐츠 중심의 패러다임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다. 과거에는 통신인지 방송인지를 따지는 형식논리가 중요했겠지만 콘텐츠가 중요해지면서 그 같은 구분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지난 8일 나는 방통융합추진위가 주최한 워크숍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도 주장했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논의가 콘텐츠에 주목하기보다는 통·방의 형식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통·방을 어떻게 융합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융합의 결과로 나타날 ‘막대한 콘텐츠 수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와 관련한 전략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콘텐츠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통·방융합에 관한 논의가 콘텐츠 중심의 패러다임 변화에서 비롯됐다면 궁극적인 지향점도 콘텐츠여야 한다. 통·방융합으로 탄생할 거대한 시장에 어떤 콘텐츠를 채울 것인가, 그 시장이 투명하고 건강하게 움직이게 하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 그리고 거기서 우리 기업이 주도권을 쥐게 하려면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등 논의할 주제와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만일 준비가 부족하다면 그 거대한 시장이 자칫 무주공산으로 방치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기업도 자체 개발의 노력 없이 당장 쉬운 방법이라고 해외 우수 콘텐츠를 수입하기만 한다면 중계권 분쟁 사례에서 보듯이 의존도만 높아져 가격은 오르고 이익은 거의 남지 않는 초라한 풍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통·방융합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통·방융합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엄청난 기회는 콘텐츠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서병문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장 bmsuh@kocc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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