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연대기에 있어 1963년부터 선보인 슈퍼 로봇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기둥인 ‘리얼 로봇’이 빠질 수 없다. ‘기동전사 건담’으로부터 시작된 리얼 로봇(혹은 리얼메카)의 역사는 분명 슈퍼 로봇에 비할 수 없지만, 1980~90년대 사실상 애니 업계를 장악한 이들을 빼고 로봇 연대기를 거론할 수 없다.리얼 로봇이란 무엇인가? 흔히 ‘진짜로 만들 수 있는 로봇’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상상 과학의 이야기가 그렇듯 ‘건담’같은 리얼 로봇도 어디까지나 상상의 산물 즉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을 리얼 로봇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마징가Z’로 대표되는 슈퍼 로봇과는 달리 바로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슈퍼 로봇은 조금(아니 정말로) 말이 안 된다. 남박사는 삼각자 하나로 ‘태권V’를 설계하고, ‘마징가Z’는 아무리 심한 피해를 입어도 1주일이면 회복된다.
조종사는 로봇을 자신의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기업이나 국가가 아닌데도 돈이 어디서 나는지 상상을 초월하는 로봇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 뿐인가? 도마뱀 꼬리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도쿄라는 도시 역시 아무리 많이 부셔져도 1주일이면 해결. 그렇게 큰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나라에선 ‘마징가Z’를 압류해 대량 생산할 생각조차 안 하니 로봇 자체는 제쳐두고 그 세계 자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할까.
그에 반해 ‘건담’은 현실의 모습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두고 있다. 부품이 부족해서 다른 기계의 부품을 쓰는가 하면, 식량 부족으로 폭동을 벌이기도 하고, 전투 중에 콜로니가 파괴돼 우주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게다가 조종사 만이 아니라 정비반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연방군’이라는 군대의 체제에 따른 수많은 제약이 있다. 이렇듯 현실적인 로봇 애니로 로봇의 전투보다 인간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모빌슈츠 건담’은 당시 주시청자였던 아이들에게 외면당하고 결국 49화로 조기 종영되었지만, 그 현실적인 면이 청소년과 성인층의 눈길을 끌어 리얼 로봇의 붐을 일으키게 된다.한때 몰락했던 ‘건담’의 극장판이 폭발적인 인기 속에 개봉된 것이 80년대 초. 그리고 이로부터 리얼로봇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1981년 조종석이 투명한 창으로 노출되어 있고, 4발 달린 탱크가 나오기도 했던 작품, ‘태양의 어금니 다그람’으로 계승되었던 리얼 로봇은, 그후 ‘전투 메카 자붕글’을 거쳐 팬터지 세계를 무대로 로봇의 전투를 그리고 있는 걸작, ‘성전사 단바인’을 탄생시켰고, 그 후 해외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어 결과적으로 미국의 ‘헤비기어’에 영향을 주었던 ‘장갑기병 보톰즈’로 계승되기에 이른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고작 3~4m 밖에 되지 않는 크기로 시가전이나 실내전에도 특화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주인공 로봇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의 주인공은 상황에 따라 장갑 보병을 탄다. 당연히 부서지는 일도 많고 상황에 따라서는 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외전 작품인 ‘기갑엽병 메로우링크스’에서는 로봇을 타지 않고 총 하나만 든 채 로봇과 싸우는 주인공이 나오기도 하니 현실성의 극치를 달린다고 할까?
그리고 같은 시기, 로봇 애니라고 할 수도 없는 작품, ‘마크로스’로 인해 이런 현실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전투기에서 변신하는 ‘발키리’라는 로봇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는 그 밖에도 주로 ‘포병’으로 사용하는 배트로이드라는 메카들이 등장하는데, 로봇이라기보다는 다리 달린 탱크처럼 생긴 이 메카들은 출연 자체는 짧았지만, 이제까지의 어떤 작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실적인 분위기’의 로봇으로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후, ‘푸른유성 레이즈너’. ‘기갑계 가리안’, ‘드래고너’ 등 다양한 리얼 로봇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1989년 리얼로봇의 정점이 어떤 것인지를 선보이는 작품이 등장했다.‘기동경찰 패트레이버’라는 이 작품은, ‘리얼’이라면서 이제껏 세계의 운명을 걸고 다소 과장된 싸움을 했던 로봇 애니메이션에서에서 ‘경찰용 로봇’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였다.
가까운 미래, 레이버라고 불리는 로봇이 널리 사용되면서 레이버에 의한 범죄가 증가되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이 도입한 레이버 부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다. 2개 팀 단 6대의 패트레이버에 거의 100명 가까운 정비반이 투입되고, 조종사 만이 아닌 지휘차를 대동한 팀으로서 운용되는 부대의 이야기 그것은 ‘만일 레이버라는 기계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라는 측면에서 유쾌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선보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레이버를 제압하거나, 테러 집단을 체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통 정리나 불법 주차 차량 견인, 때로는 쓰러진 트럭에서 도망쳐 나온 돼지를 잡는 일에 이르기까지 패트레이버는 생활 그 자체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 것이다(특히 이제까지는 조연에 지나지 않았던 정비반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렇듯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 패트레이버의 등장 이후, ‘파워돌’처럼 순수한 병기(도구)로서의 리얼로봇 이야기가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겉보기엔 슈퍼로봇이지만 샐러리맨이 조종하는 초 리얼로봇,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 같은 작품도 선보이기에 이른다.
지금도 리얼 로봇은 더욱 더 다양하고 어쩌면 내일이라도 주변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인간들의 드라마’, ‘살아 숨쉬는 현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리얼 로봇물의 매력이다.SF 칼럼리스트. 게임아카데미에서 SF 소재론을 강의 중이며, 띵 소프트에서 스토리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스페이스 판타지(http:www.joysf.com)란 팬 페이지로 유명하다.
<사진설명>
-‘건담’의 이야기는 ‘제타’로 이어져 더욱 처절하게 그려지게 되었다.
- 이것이 정확한 로켓 펀치의 실례. 팔을 뽑아 던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 리얼 로봇의 정상적인 사용례.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하다.
- 초합금 슈퍼 로봇이 정말로 등장한다면? 이렇게 되어 버릴 것이다.
-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정비반 이야기. 리얼 로봇엔 이런 현실성이 충실하게 들어 있다.
-‘태양의 어금니 다그람’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당이 아니라 이권을 노리는 회사에 대항하는 게릴라들이 주역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팬터지 세계에서 로봇이 활약한다면? 성전사 단바인에서는 그러한 상상을 현실화하고 있다.
- 디자인이나 설정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보톰즈의 영향을 받은 헤비기어. 국내에도 PC 게임으로 소개되었다.
- 보톰즈의 주역인 장갑보병(AT).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전홍식기자 pyodogi@sfw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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