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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IBM에 입사한 한국인 IBM 직원 1호였다. 그 해 1월에 IBM 소프트웨어 본부가 만들어지고 6개월 후에 내가 입사했으니, 나는 사실상의 창립 멤버인 셈이다. 이때 IBM 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은 나의 IT 인생의 결정적인 자양분이자 나의 IT 정체성을 규정한 문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거대 증권회사인 딘위더의 컴퓨터 시스템을 분석,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문제가 있었던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는 비즈니스 랭귀지 그룹으로 옮겼다. 이 때 미국 정부의 코볼 개발 정책에 따라 4개월 안에 코볼을 개발해야 하는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이 때 정말 모두 미친 듯이 일했다. 어느 날인가는 아침 6시쯤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이날 따라 브로드웨이의 풍경이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거리에 불이 환하고 사람들도 무척 많았던 것이다.
“아니, 새벽같이 왜들 이리 많이 나와서 돌아다니는 거야? 브로드웨이에 갑자기 정신병자들이 많아졌나!” 그런데 내가 사무실에 들어가니 동료 직원들 모두가 의아하게 나를 바라봤다. “아니, 방금 퇴근한 사람이 왜 다시 돌아왔어?”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오후 4시에 퇴근하면서 내일 아침 6시까지 출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집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보니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눈을 붙였기 때문에 실제론 이때가 저녁 6시 무렵이었는데, 나는 하룻밤이 지나 그 다음날 아침 6시가 된 것으로 착각,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회사로 왔던 것이다.
그러던 중 덴마크 정부가 IBM7070을 도입, IBM은 나에게 그 데이터센터의 고문 역할로 파견을 요청했다. 좋은 조건이어서 승낙을 했다. 그러나 IBM이 신중을 기하는 바람에 이 계획이 취소됐고 나는 회사에 한국으로 휴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7년 만에 한국에 귀국했다. 당시 한국은 컴퓨터 불모지였다. 경제기획원 산하 통계국에서 IBM 602 펀치카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계산기 수준이며 펀치카드를 줄로 연결한 것이 일종의 프로그래밍인 형태였다. 나는 과거 고려 시대에 목화씨를 가져왔던 문익점을 떠올리며 내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 했다. 컴퓨터 분야의 진출에 있어서 한국은 우수한 인력이 풍부한 장점이 있는 반면 각종 자본은 거의 축적돼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조건에 가장 적합한 분야가 소프트웨어 쪽이다. 그런데 한국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핵심 요소인 사람이 있으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이 서자 난 바로 IBM의 회장인 T J 왓슨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IBM이 한국에 진출해야 한다며 그 근거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에 회장은 직접 답장을 써서 자기도 간과했던 일이라고 하며 칼 어윈 부사장 등을 파견 하겠으니 토론해 보라고 답장했다. 난 1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장이 그렇게 정중하고 성의 있게 답해준 데 대해 감동받았다. 그 후 부사장 일행이 한국으로 왔고 그들과 나는 IBM의 한국 진출에 필요한 절차와 시장가능성 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