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평적 역무 분류체계를 도입하자
“통신·방송서비스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적극적인 경쟁촉진 정책 등을 통한 투자활성화로 IT산업 발전을 선도했으나 최근에는 성장 정체, 융합서비스에 대한 법·제도적 지원 미흡 등으로 시장전망이 불투명해졌다. 현재의 규제 틀을 통·방 융합 환경도 포괄할 수 있도록 재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이 최근 연두업무보고에서 밝힌 내용이다. 진 장관의 지적처럼 통신환경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기존 규제의 틀로는 기술과 시장의 변화를 다 수용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것이다.
새 규제 정책 논의의 첫 번째 출발점은 현재 수직적 체계를 수평적 체계로 바꾸자는 것. 각론에서는 통신이나 방송진영 간 다소 이견이 있지만, 큰 틀에서의 규제 정책이 수직적에서 수평적 성격으로 바뀌어야 한다는데는 동의한다.
◇수직·수평적 규제, 무엇이 다른가=현재 규제 틀인 수직적 체계는 전송 플랫폼의 기술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즉 유선, 무선, 음성, 데이터, 통신, 방송 등을 영역별로 분리한다. 특정 네트워크, 단말기, 서비스가 일치되며 각 서비스는 역무라는 틀에서 독립된 규제방식을 적용받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시장 지배력은 망이나 플랫폼의 설비 보유 여부에서 가름됐다. 이는 전송 플랫폼별로 전달경로가 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무구분이 명확했던 90년대는 유의미한 정책이었다.
반면 수평적 체계는 네트워크와 콘텐츠를 분리, 규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네트워크는 기술적 특성이나 역무와 관계없이 동일한 규제를 받게 된다. 이런 정책이 필요한 이유는 기술발달로 하나의 망과 플랫폼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동일 서비스가 서로 다른 통신망이나 방송망을 통해 제공될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케이블을 통해 제공되는 음성서비스,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방송 서비스가 그 단적인 예다.
◇왜 수평적 규제가 필요한가=수평적 규제는 기존 틀로 변화된 환경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일차적 요인이다. 과거에는 망의 독점적 성격이 강했다. 또 원천적인 경쟁력은 네트워크의 보유에서 결정됐고, 시장도 그런 역무구분과 일치했다. 그러나 변화하고 있는 통신시장은 기술발전으로 망에 대한 독점성이 점차 약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업의 경쟁력은 제공되는 서비스나 콘텐츠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기존 음성이나 데이터, 방송 등의 역무 분류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게 됐다. 이런 환경에서 기존의 규제 틀을 적용할 경우 사업자는 이중 삼중 규제를 받아야만 한다. 또 동일 서비스가 다른 망을 통해 제공되는 경우 다른 영역의 규제를 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궁극적으로 수평적 규제는 자연스럽게 진입 규제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효과를, 공정경쟁이나 공공영역에서의 규제는 강화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수평적 규제의 도입은 이미 세계적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002년 네트워크와 콘텐츠 부문을 분리 규제하는 체계(NRF; New Regulatory Framework)를 도입했다. OECD도 ‘수평적 규제 틀이 융합환경에서 유사한 서비스에 대한 규제의 일관성을 높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는 아직까지 영역별 규제 체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WTO 협상에서는 네트워크와 콘텐츠를 구분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인터뷰-수평적 규제 이렇게 본다: 이기주 정통부 통신방송융합기획단장
“수평적 규제 틀은 기본적으로 규제를 축소하자는 의미입니다. 특히 IPTV와 같은 융합서비스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법만으로 규제하기 힘들어진다는 변화된 상황도 있습니다.”
이기주 정통부 통신방송융합기획단장(국장)은 규제의 관점을 수평적으로 바꾸는 것은 기술과 서비스 발전에 필연적인 상황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단장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수평적 규제 틀을 말하면서 네트워크와 콘텐츠 영역 사이에 플랫폼의 영역을 별도로 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단장은 “OECD에서 제시하는 수평적 규제의 개념에서도 플랫폼 사업자를 별도로 두지는 않는다”며 “구분이 많아질수록 그에 따른 규제도 많아지는 법인데 굳이 플랫폼 사업자를 별도로 둘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단장은 “수평적 규제라는 규제 철학을 적용하는 데는 과도기가 필요하다”며 “통신도, 방송도 아닌 융합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버리고, 새 서비스를 수용할 수 있는 공정경쟁 틀부터 만드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동일서비스 동일규제’라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 그는 “이런 접근법은 융합 서비스가 100% 이뤄진 것을 전제로 한다”며 “과도기 상황에서 기존 틀을 적용해 동일 서비스 동일규제를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즉 현재 논의되는 IPTV는 망의 성격이나 양방향 서비스라는 점에서 기존 방송과는 차이점이 있음에도 방송 성격만을 내세워 기존 틀로 규제한다는 것은 적합지 않다는 견해다.
◆기고: 수평적 역무제도 도입 하려면
-정윤식강원대교수 ysjung@kangwon.ac.kr
우리는 그동안 방송의 공익성이 과도하게 강조되고 지상파방송 , 종합유선방송, 위성방송, DMB 등 매체별로 사업자의 지위와 성격이 판이한 이른바 ‘수직적 규제체제’에 익숙해져왔다. 이런 상황에선 네트워크와 콘텐츠의 분리 규제를 핵심으로 하는 ‘수평적 역무제도’의 도입은 현실적으로 수용키 어렵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과 미디어 융합이라는 새 미디어 질서와 규범에 대응하고 조만간 글로벌 스탠다드로 정착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평적 규제체제를 수용키 위해선 개방적인 마인드와 전향적인 자세가 요청된다.
수평적 규제체제에선 지상파방송과 다채널 유료방송을 동일 관련 시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나 우리나라 지상파방송의 경우 △보도·교양·오락 등 프로그램상 균형 보장 △민주사회발전을 위한 여론형성 △지역방송으로서의 역할 등 사회적으로 부여된 공적 임무 및 사회적 영향력과 매체의 역사성이 다채널 유료방송과는 다르다. 때문에 허가·진입·소유권·내용에서 다채널 유료방송과는 차별적인 규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단 SO, 위성방송, DMB, IPTV 등 유료방송은 동일시장·동일서비스로 인식하고 동일한 허가/진입규제, 소유권, 내용규제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의 사례에서 보듯 전체 유료시장을 하나로 묶고, 한개 콘텐츠사업자가 30%까지 점유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 수평적 규제체제에서는 네트워크 사업자는 일반 경쟁법의 규제를 받으며 망의 중립성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네트워크 사업자는 다양한 콘텐츠 사업자에게 망의 투명하고도 공정한 접속, 시장지배력의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 IPTV를 준비하는 KT는 네트워크 사업과 콘텐츠 사업을 독자적으로 수행할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 사업자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망을 개방해야 한다.
수평적 규제체제로의 전환은 규제기관 통합과 미디어융합 관련 법령정비와 동시에 처리해야할 현안 정책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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