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기 극복 후 기회를 갖다
‘도어폰’이 처음부터 시장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그린 ‘도어폰’의 도면을 들고 제작 기술자를 만났을 때 그는 분명 짧은 기간 안에 제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제작에 들어가고 보니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시행착오가 반복되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그 ‘시간’은 곧 ‘돈’이기도 했다. 제작이 지연될수록 여기저기 자금을 융통하러 다니는 발걸음도 다급해졌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도어폰’ 개발에 성공한 것은 4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정작 고생은 그 때부터였다.
소비자들은 불편을 감수할지언정 굳이 고가의 ‘도어폰’를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직접 물건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고급 주택가와 신축 현장 등 하루 수십 군데를 돌며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제품 홍보를 하고 다녔지만 매몰찬 외면뿐이었다. 상황은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숨이 깊어지면서 부채와 채권자들의 빚 독촉도 늘어갔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조차 없는 상황, 깊은 절망과 고통의 나락은 급기야 나를 ‘죽음의 벽’ 앞으로 내몰았다. 어쩌면 ‘죽음’이란 극단적인 방법은 당시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몰랐다.
12월의 차디찬 저녁,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남산으로 향했다. 중턱쯤 올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안엔 소주병과 수면제가 한움큼 들려 있었다.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자동차들의 행렬은 내 슬픔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보였다. 이대로 소주에 수면제를 타 먹고 잠든다면 내일 아침 나는 동사체로 발견될 터였다. 그러면 죽음보다 감당하기 힘든 이 무거운 현실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소주병을 콱 움켜 쥐었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부모 형제와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믿고 있는 그들에게 내 모든 짐을 떠넘길 순 없는 일이었다.
“살자! 죽더라도 빚은 갚고 죽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떠난다면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더 큰 빚을 지는 것 아닌가. 내게 대한 그들의 믿음을 살아서 반드시 갚자!”
그 날의 다짐은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올라 성장세로 돌아선 이후 지금까지 가슴 한 켠에 아리게 각인되어 있다.
당시만 해도 ‘벙어리 (장사꾼)도 3년만 지나면 말을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장사꾼은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인식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나는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런 담보없이 나와 회사 하나만 믿고 자금을 빌려준 고마운 사람들, 이들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빚을 내서 빚을 갚기도 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며 쓰러졌던 외환위기 때 조차 큰 고비없이 지금껏 튼튼한 재무 구조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엔 바로 그 ‘신용’의 힘이 컸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을 아닌 듯 싶다. 다른 기업인들과 얘기를 나누어 봐도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시련과 역경 한두 번쯤은 무용담처럼 얘기하니 말이다.
bbduk@commax.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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