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백의 武林紀行](20)총 앞에선 고수들도 추풍낙엽

무협에 결코 등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바로 갑옷과 총이다. 갑옷 입은 무사는 있을 수 없고, 총이 등장하면 무협의 세계가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사실 무협에도 갑옷이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단지 이때의 갑옷이란 병졸이나 장군이 입는 그런 갑옷이 아니라 천잠사(天蠶絲 : 천잠, 즉 하늘의 누에에게서 뽑아낸 실)로 짜서 어떤 칼로도 찢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수화불침, 즉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는 보물급 호신복을 말한다.고룡의 ‘다정검객무정검’에 나오는 금사갑이라거나, 한국무협에 수없이 등장하는 천잠의 등이 대표적이다. 소슬의 ‘낙성추혼’에는 금갑마, 은갑마, 동갑마, 철갑마 하는 식으로 갑옷을 입은 무림 마두(魔頭 : 마귀들의 두목이라는 뜻이니 보스 급 악당이라고 할 수 있다)들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극히 이례적이고 특별한 등장이지 무림인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채 등장하는 세계로 무림이 그려져선 곤란한 것이다.

갑옷은 당연히 군인이 입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이 함부로 입어선 안 된다. 다음으로 무협의 세계에서 보통 갑옷은 거의 방어의 효과가 없게 그려지기 때문에 입을 이유도 없다. 이게 게임의 차원에서 무협이라는 배경이 갖는 큰 약점이 된다는 걸 게임관련 종사자라면 잘 아실 것이다.

게임에서 아이템이란 게임의 재미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데 무협은 팬터지와 비교하면 방어구라는 아이템의 중요한 분야를 통째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협게임은 이 부분을 살짝 무시하고 갑옷을 그냥 등장시킨다. 대신 무협의 분위기가 아니라 동양풍 팬터지 게임의 분위기가 나는 건 감수해야 할 일이다.총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더욱 중요한 문제다. 사실 화약은 서양보다 동양이 몇 백 년이나 앞서서 발명했다. 근세 이전에는 화약무기 또한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진보된 형태의 것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무협이 배경으로 삼는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라고 하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의 총이 수입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몇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대부분의 무협에서는 총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마치 총을 혐오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직접 읽어보진 않았지만 대만에서 이런 내용의 무협소설이 나왔다고 한다. 유명한 검객이었던 아버지가 다른 검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아들은 산으로 들어가 십년 간 열심히 검술을 수련했다. 드디어 적보다 검술이 나아졌다는 자신이 생긴 아들이 원수를 찾아가 칼을 뽑았다. 그러자 원수는 총을 뽑아서 그를 쏴 죽인다.

필자가 예전에 본 무협 중에 ‘혈우성풍’이라는 소설이 있다. 7권 짜린데 6권까지는 여타의 무협처럼 주인공 홀로 악당의 무리에 맞서서 열심히 싸운다. 6권 말 쯤 주인공은 연인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악당의 무리들은 산을 에워싸고 포위해온다.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흥미진진하게 7권을 펼쳤더니 무림인들이 소란을 피운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관군들이 조총으로 악당들을 전부 쏴 죽여 버린다. 관군들을 피해 숨어있어서 간신히 살아남은 주인공은 총 맞아 죽은 악당들의 시신들을 보며 이제 무인의 시대는 갔다고 말하며 쓸쓸히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런 소설들을 반(反) 무협이라고 부른다. 무협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무협의 세계를 비판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쓰여진 소설이다. 김용의 ‘녹정기’도 그런 면이 있다. 주인공 위소보는 황제의 칙사로 운남에 갔다가 총독으로부터 두 자루의 권총을 선물로 받는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가서 이 권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당 풍청양이 사부인 진근남을 비겁한 수단으로 죽여 버리자 권총을 뽑아 풍청양을 쏴 죽여 버리는 것이다. 직접 한 게 아니라 항상 붙어 다니던 연인이 그러긴 했지만 어쨌건 당대의 초고수라도 권총엔 못 당한다고 그려진 것이다. 이 부분을 보면 김용이 이 작품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한 이유가 짐작된다. 무협이 디디고 있는 현실과 가상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김용은 현실 쪽으로 발을 옮겨버린 것은 아닐까.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무협과 총의 불화는 청 말에 있었던 ‘의화단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 의화단의 난은 백련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다. 백련교의 수뇌부는 교도들에게 주문을 외우며 싸우면 총알도 튕겨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걸 맹신한 교도들이 총 앞에 주저 않고 몸을 던지는 바람에 무수한 희생자가 생겼는데 그 중에는 무술인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희생으로 중국무술의 절반은 사라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아무리 고수라도 총 앞엔 안 된다는 사실을 의화단의 난은 중국무술의 역사에 깊이 새겨놓은 셈이다.

갑옷과 총 이야기는 보통 게임 설정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무기와 방어구의 체계에서 방어구가 통째로 빠진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한 것이다. 무기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총과 대포가 빠진다. 활은 보통 졸개들이나 사용하는 것으로 나오긴 하지만 그럭저럭 살아남는다. 묘하게도 대포는 빠지지만 화약무기가 통째로 빠지지는 않는다.

산서 벽력당(霹靂堂)이라는 단체가 무협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이곳은 화기의 제작과 사용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 단체가 직접 등장하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샀다고 하거나 간에 이 이름이 나오면 현대의 다이너마이트에 필적할 듯한 폭탄이 사용되기도 하고, 화염방사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통이 등장하기도 한다.사마령의 ‘음마황하’에는 전신에 철갑옷을 입고 얼굴까지 중세의 기사처럼 철갑투구로 가린 사람이 한 손에는 방패,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통을 들고 나타난다. 주인공이 거기 맞서 싸워야 하는데 머리 좋은 주인공이 상대가 사용할 기술을 미리 눈치 채고 그 통부터 부수는 것이다. 그러자 통이 폭발하며 불이 나서 상대가 먼저 타버린다. 알고 보면 이 상대는 산서 벽력당에서 온 사람이고, 그 통은 화염방사기, 옷은 일종의 방화복이었던 것이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이 등장하면 이름만 총이 아니지 거의 총이나 다름없는, 때로는 더 좋은 무기도 나온다. 이곳은 사천에 자리잡은 당씨 가문인데 대대로 독과 암기에 대한 특기를 유지해왔다고 설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만든 암기 중에는 수백 개의 작은 침들을 채워 넣은 철통이 있다. 그리고 단지 스프링의 힘만으로 백여 개씩 쏘아 보내서 피할 틈도 없이 적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연발사격도 가능하다. 이쯤 되면 총보다 낫지 않은가. 총이라는 금기를 피했을 뿐 아니라 중국식 과장을 덧붙여 만들어진 결과다.무협작가로 ‘대도오’, ‘생사박’, ‘혈기린외전’ 등의 작품이 있다. 무협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제작하는 인디21의 콘텐츠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다.

<좌백(佐栢) jwabk@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