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희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중소 부품소재 업체들을 취재하러 다니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기자란 본래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것이 주업이니 많은 말을 듣게 되지만 듣고 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제품 홍보를 위해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도 “와 주셔서 고맙다”든지 “신경 써 주셔서 고맙다”는 말은 흔히 하지만 “들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요새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있다. 주로 중소 업체를 취재할 때다. 기자를 상대로 중소 부품소재 업체의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하다 보면 어느덧 말이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진다. 말을 마치고 나서야 긴 시간 이야기했음을 깨닫고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멋쩍은 인사를 하는 것이다.
세상 어느 사업이 쉬운 게 있으랴만 한국에서 중소 부품소재 업체를 경영하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대기업의 횡포, ‘을’로서 겪는 온갖 수모, 갑갑한 경제 상황 등에 대해 일단 말을 꺼내면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제일 큰 주제는 역시 고객사들의 전횡이다. 중소기업을 ‘협력’ 업체가 아닌 ‘하청’ 업체로 생각하는 대기업들이다. 부품소재 업체의 공급가를 후려치고 자신들은 상여금 잔치를 하는 모습에 중소기업인들의 가슴은 멍이 든다. 그 사연을 기자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중견 소재 업체 경영자에게서 외국의 유명 반도체 업체의 협력 업체 정책에 대해 들었다. 그 회사는 그간의 공동 작업 역사, 공동 기술 개발 정도,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협력 업체들을 분류한다. 그리고 점수가 높은 업체들의 경우 공급가 인하폭을 줄여주는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고 한다. 국내 업체 사이에서 이런 파트너십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이제 ‘상생’이 화두다. 부품소재 산업을 육성한다고 한다. 수요 업체와 공급 업체가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의 중소기업인들은 아직 회의적이다.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더 남아 있다. 이 말을 들어주는 데서 상생은 시작된다.
디지털산업부·한세희기자@전자신문, h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