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장기불황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를 밑바침해온 기업들이 있다. IT버블시대에는 ‘굴뚝기업’이라는 다소 폄하어린 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안정적인 성장과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장인정신으로 뭉친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이 모여 있는 곳이 일본 교토(京都)다. 본지는 최근 국내외 정보기술(IT) 기업 사이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교토식 경영’에 대해서 10회에 걸쳐 다룬다. 특히 일본 현지의 기업을 방문, 창업자로부터 교토식 경영에 대한 생생한 사례 등을 집중적으로 소개한다.<편집자>
지난 96년부터 세계 경기가 급랭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 97년에는 태국에서부터 불어온 외환위기가 전염병처럼 세계를 휩쓸고 지나면서 수십 년간 탄탄하게 성장해온 기업들이 휘청했다. 90년대 말 세계 경기는 외환위기로 여러움을 겪었고 경제 강국 일본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소니, 마쓰시타,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성장률이 크게 둔화됐다.
세계 경기가 외환 위기로부터 벗어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벤처 경기가 살아났지만, 이내 ‘버블’이 가시면서 기업들은 지난 2001년 이후 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벤처 열기가 식으면서 마쓰시타 등이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의 경기 침체 속에서도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견실하게 성장해온 교토(京都)의 기업들이 화제다. 로옴, 교세라, 무라타제작소, 일본전산 등 10개사가 주인공이다.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천년 고도(古都) 교토에 둥지를 틀고 사업을 꾸려온 이들은 일본이 장기 불황으로 고전하는 동안 일본의 대표 업체들에 비해 고성장과 고수익을 실현하고 있다. 총자산이익률(ROA)을 기준으로 타지역 전자업체에 비해 5∼7배 격차를 보일 정도다. 이들 기업은 지난 14년간 연평균 6.7%라는 높은 매출이익률을 기록했으며 IT 버블이 붕괴한 지난 2001년에도 이익률이 3.4%에 달했다.
게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7명의 일본인 중 6명이 교토대학 출신으로, 이 지역의 장인 문화, 기업의 정서 등이 교토만의 경영 방식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교토식 경영이란=교토대 경제학부 쓰에마쓰 교수는 버블 붕괴 후 일본 기업들이 업적 악화에 허덕이고 ‘일본적 경영’의 문제점이 부각될 때, 교토에 근거지를 둔 첨단 IT 기업들에 주목했다. 이들은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자기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았다. 쓰에마쓰 교수는 이에 주목, 이들이 갖는 특징을 ‘교토식 경영’으로 명명했다.
쓰에마쓰 교수의 개념 정의 이후 교토식 경영은 기존 일본식 경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모델’로서 주목받았다. 일본 재계에서 영향력 있는 경영자들이 교토식 경영을 언급하면서 이 개념을 날개를 달게 됐다.
사또 로옴 사장,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 시게노부 일본전산 회장 겸 사장이 일본식도 아니고 미국식도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실적을 내고, 이것이 젊은 경영자층에 급속도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나카무라 마쓰시타 사장은 ‘우리가 배워야할 기업은 로옴, 무라타제작소, 엡손’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양준호 수석연구원은 “최근 2∼3년간 일본에서 교토 기업의 경영 방식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 뜨거운 관심이 있었고 이제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론으로 발전했다”며 “교토식 경영은 일본의 소니, 마쓰시타, 도시바 등 명문 기업들도 벤치마킹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높은 성과를 내는 교토의 기업들은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카리스마를 가진 오너 △현금 흐름과 무차입 지향 △기술 기반의 사업 특화와 글로벌 시장 도전 △열린 수평적 분업구조 구축 등이다.
◇특징1. 카리스마 있는 경영자=교토 기업의 특징은 개성이 강한 오너들이 일사불란하게 경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옴의 사토 사장은 음악가 지망생이었다가 회사를 차렸으며 호라비제작소의 호리바 사장은 ‘재미있고 엉뚱하게’를 사훈으로 채택할 정도다. 나가모리 일본전산 사장은 어려움을 당한 기업에 컨설팅을 해줄 때, 그 회사의 주식을 받아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는 등 독특한 면이 있다.
교세라의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창업초기 개발한 세라믹콘덴서가 무명 벤처 기업의 제품이라는 이유로 일본 대기업에 외면당하자,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협상을 추진해 TI와 계약을 한 일화도 있다. 이후 세계 시장에서 승승장구한 뒤 일본 대기업들이 이 제품을 역수입하는 일도 발생했다.
무라타제작소의 경우 제품·기술은 물론 경영과 조직에서 독창성을 강조한다. 창업 이후 ‘타사가 흉내를 낼 수 없는 제품’, ‘흉내 낼 수 없는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지금도 사내 슬로건으로 ‘우리 길을 걷자.’, ‘타사는 의식하지 않는다.’, ‘일렉트로닉스의 혁신자’ 등을 내세우는 등 독창성을 추구하고 있다.
독특한 성격이 있다 보니 회사의 경영도 독특하다. 일단 타 기업에 비해 빠르게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는 장점이 있다. 양준호 연구원은 “교토 기업들은 톱다운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고 있어 사안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며 “특히 로옴의 사토 사장은 경영방침을 임직원에 전달하기 위해 국내외 공장의 운영을 본사가 직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리바 사장은 시장 트랜드를 미리 파악해 상품화시키는 것이 승부의 관건으로 보고, 시장 고객과 직접적인 관계를 우선시하고 있으며 개발·생산·영업 부문의 생산성을 시간단위로 환산해 ‘초단납기 기업(Ultra Quick Supplier)’을 실현했다.
이외에도 교토 기업들의 오너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한다. 일본산전은 미국 회계기준으로 감사를 받고 뉴욕 증시에 상장했으며, 공장부지 이외에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는 등의 경영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특징2. 실익 위주 경영=교토식 경영을 하는 기업들은 기업의 실질적인 수익을 중시할 뿐 외양에 치중하지 않는다. 매출 확대 경쟁을 벌이지 않고 이익 창출과 비용 삭감에 노력을 기울여 경쟁력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김중언 로옴전자코리아 사장은 “로옴은 무리하게 경쟁을 벌이지 않으며 업무 절차 및 기술 개발을 통해 비용을 남들이 따라하기 어려울 정도로 줄여, 원가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며 “이를 통해 높은 수익성으로 진출하는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교세라의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매출 극대화를 통해 단위매출당 경비를 줄이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연공서열제 대신 성과주의·능력주의 인사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성과와 임금 비용을 연계시키고 있다.
교토기업들은 내부적으로 원가 경쟁력을 갖추는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무차입 경영을 표방하고 있다. 양준호 연구원은 “기존의 일본 기업들이 주거래 은행에서 차입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는 것과 달리 국내외 자본 시장과 투자자를 통해 직접 조달 방식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니치콘은 30년전부터 한결같이 현금 흐름을 중시하고 있으며 교세라 역시 회계상 이익보다 현상흐름상의 이익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로옴, 니치콘, 도세 등은 차입금이 없는 상황이며 무라타도 차입금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연구원은 “교토기업의 자기자본비율이 지난해 3월 기준 평균 64.7%로 동종 타사나 상장기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징3. 특화된 기술로 승부=교토 기업들이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던 것은 무엇보다도 특화기술과 특화제품으로 세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토 기업들은 가능한 한 사업 다각화를 지양하고 자사가 강점이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사업을 확장하더라도 강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움직인다. 이는 기술자 출신인 창업자들이 자신이 확신하는 기술과 제품을 갖고 창업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니치콘의 다케다 사장을 제외한 9개사의 창업자가 기술자 출신이다.
혁신을 위한 내부적인 노력도 장점이다. 로옴은 설비를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있어, 자사만이 생산할 수 있는 기계 설비를 갖추고, 이를 통해 원가 혁신을 이루고 있다. 김중언 로옴전자코리아 사장은 “반도체 팹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직선형인데 비해 로옴은 자체 기술로 층층 구조를 갖는 등 특화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기술과 가격 면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특화 기술이 있고 원가경쟁력이 있다 보니 처음부터 글로벌 경영을 추진해왔다. 무라타제작소는 세라믹전자부품에서 세계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등 교토 기업들은 자기 분야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교토 기업 들은 글로벌 경영을 통해 일부 시장에서 부진하더라도 안정된 수익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특징4. 열린 수평분업 구조=교토 기업은 일본의 여타 기업과 달리 ‘탈계열화’ 노선을 걷고 있다. 기존 대기업 계열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 성향이 강하다. 교토 기업의 창업자들이 미국 기업들과의 거래를 통해 ‘열린 기업간 관계’를 체득했고, 이를 경영에 적용했다.
열린 수평분업 구조가 가능했던 것은 부품 중심의 사업이면서도 독자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내 대기업과 부품 기업이 수직 계열화된 것과는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양연구원은 “대기업 계열 하청업체가 되면 특허소유권 확보나 계열 외 기업으로 거래처 확장이 곤란하다는 인식을 창업자들이 갖고 있고, 실력 있는 독립 기업으로 수요 기업과 대등한 입장에서 분업 관계를 형성하는 전략을 짠 것”으로 설명했다.
이경우·장동준·김규태기자@전자신문, kwlee·djjang·star@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쿄토기업` 10사의 현황